물을 머금은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어젯밤에 내린 비가 채 증발하지 않은 탓이다. 모래사장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맨 위의 모래알은 말랐으나 겹겹이 덮인 아래의 것들은 축축했다. 비는 수시간이 지난 아직까지도 하늘 아래 모든 것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오늘 아들은 모래를 가지고 놀았다. 화단에 놓인 돌멩이와 자갈을 만져본 적은 있어도 모래로 가득찬 곳에서 논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들은 어떻게 놀아야할지 몰라서 모래사장을 얼마동안 서성였다. 아빠와 엄마가 소매 걷고 나섰다. 옷에 모래가 묻든지 말든지 바가지를 들고와 모래를 퍼서 성을 만들고 누가 파놓은 흙길에 모래를 들이부었다. 모래알의 촉감을 느끼게 해주고 성을 쌓고 무너뜨리는 걸 보여주자 주완이는 금세 적응했다. 신나서 뛰노는 아들을 보고 아빠 엄마가 더 신났다.
운동장에서 땅따먹기 게임을 하고 놀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수학 시간에 콤파스로 원을 그리듯 손을 쫙 펴서 엄지손가락을 기준으로 큰 원을 그렸다. 이걸 반복해서 나중에는 누가 더 큰 영토로 확장하는가 대결했다. 모래판 하나로 대동단결했던 1학년 4반의 방과후 시간. 몸과 머리는 너무 커버렸지만 마음만은 그때로 돌아간듯 했다.
아이와 놀면서 나의 어린시절을 들여다볼 기회를 얻는다. 아내와 나는 육아 중에 마음속 옷장 맨 구석에 쳐박아둔 ‘동심’이란 것을 찾는다. 그때의 순수함을 잠시나마 다시 느낀다. 치열하고 바쁜 현실의 삶 가운데 느끼는 큰 축복이다.
내렸던 비가 땅을 적시고 증발하듯이, 나의 어린 시절 또한 내 마음을 적시고 어느새 증발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염려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비가 내리고 표면은 증발할 것이나 표면 아래의 것들은 여전히 젖은 채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맨 위의 모래층을 파헤치고 난 후 손에 닿았던 축축한 모래알 같이.
오늘 느낀 이 순수함은, 또 언젠가 어떤 사건으로 인해 다시 찾아올 것이다. 오늘의 모래놀이는 비다. 이 비가 우리 마음의 심부를 적셨다. 몇 달이, 몇 년이 지난 후에 2021년 5월의 마지막 날이 불현듯 뇌를 스쳐 지나갈 것이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오늘, 아내와 아들과 내가 함께 향유한 기억이 축축하게 젖어 있을 것이다.
2021.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