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빛 꿈
2017년 3월 말이었다. 군대에서 훈련을 받는 때였다. 꽃샘추위가 끝나자 바람은 꽤 따뜻해졌고 꽃이 하나둘 피어나기 시작했다. 바깥 풍경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갔다. 햇빛의 강도, 잔디의 색깔, 하늘의 푸름, 차가운 장교대 너머에도 ‘봄’이 찾아온 것이다. 개나리로 시작한 봄의 행렬은 벚꽃으로 그 절정에 다다르고 있었다. 아스팔트 바닥을 강하게 내려치는 군화 위로 벚꽃 잎이 무수히 흩날렸다. 군기가 잡혀 얼어붙은 마음이 조금이나마 녹아내렸다. 그 녹아내린 틈 사이로 추억이란 놈이 비집고 들어왔다.
6년 전이다. 내가 다니던 대학 캠퍼스 안에는 벚꽃 나무가 많았다. 중간고사 시즌만 되면 만개한 벚꽃 덕분에 시험공부에 애를 먹었다. 벚꽃 나무에 진한 분홍 잎이 보일 즈음엔 시험을 2주 정도 앞둔 시점이어서, 전부 수업 시간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도서관 자리 예약하기에 바빴다. 내 전공인 경제학은, 수업 특성상 하나를 놓치면 그다음 하나를 놓치기 십상인 학문인데 썸남썸녀와, 남친여친과 벚꽃 축제를 즐기기 원하는 우리들을 겨냥해 교수님이 한마디 한 적이 있었다.
“벚꽃은 내년에도 피지만, 여러분의 학점은 내년에 다시 피지 않아요. 재수강을 한다면야 뭐, 말리진 않겠지만. 그렇게 벚꽃을 보고 싶으면 커플 둘이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하다 잠깐 나와서 보든지. 이번 중간고사 기간에 미시경제학 공부 제대로 안 하면, 정말 힘들어져요. 각오해야 할 거예요.”
나는 저 말을 믿고 수업 한 번 빼먹지 않았고, 연애를 뒷전으로 미루며, 도서관에 매일 가서 공부하여 학점 4.5를 받는 데 성공했다.
만약 이렇게 끝났다면 얼마나 재미없는 대학생활이 되었을까.
사실은 이렇다. 여자 친구와 벚꽃 놀이를 다녀왔고, 중간고사 기간에 밀린 수업 진도를 쫓아가느라 며칠 동안 밤을 지새야 했다. 전공 공부할 시간이 모자라 다른 교양 과목 공부는 날림으로 하는 바람에 전체 학점 평점이 떨어져 버렸다. 그러나 인생에는 반전이 있어야 하는 법. 교수님이 해주신 저 말씀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 자유를 막는 교수님에게 괜한 오기가 생겨 벌인 일이었다. 연애와 공부, 둘 다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운명처럼 찾아든 여자와 손을 잡고 벚꽃을 보러 갔다. 비록 학점은 좀 떨어졌지만, 그때 손 잡고 벚꽃 길을 걷던 여자를 얻었다. 평생을 약속한 나의 아내다.
저마다에게 벚꽃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사랑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못 이룬 사랑이고, 누군가에게는 지나간 사랑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다가올 사랑이다. 벚꽃, 그것은 나와 아내를 이어주는 분홍빛 꿈이었다. 그 날 함께 먹은 도시락과 벚꽃을 풍경으로 같이 찍은 사진이 여전히 가슴속에 남아있다. 앞으로도 그 꿈은 영원히 반짝거릴 것이다.
벚꽃 피는 계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