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부시게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매일 반말만 쓰다 존댓말로 쓰려니 조금 어색하지만 이 편지가 존경과 사랑이 담긴 편지로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존댓말로 써봅니다.
이 글은 당신과 나의 ‘기억’ 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당신은 어떤 기억을 갖고 있나요? 내게 있는 당신과의 기억을 하나씩 적어봅니다. 만나고 헤어지는 순간이 아쉬워 약속한 결혼, 결혼식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바라본 당신의 아름다운 자태, 지갑을 도둑맞아 혼쭐이 났던 신혼여행, 우리가 자주 가는 초밥식 당에서 서로 연어를 먹여주던 기억, 벚꽃 핀 거리를 걸으며 꽉 잡곤 했던 두 손. 크고 작게 있었던 모든 일들이 단 몇 분 만에 아스라이 스쳐 지나갑니다. 평범하지만 특별했던 일상들…. 내게는 모두 다 보물 같은 기억입니다.
얼마 전 <눈이 부시게>라는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당신이 극찬 했던,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할머니의 기억을 소재로 한 드라마였지요. 미루고 미루다 첫 화를 봤습니다. 결국 이틀 만에 마지 막 화까지 다 보고 말았어요. 당신 표현대로 ‘명작 중의 명작’이 라 칭할 만한 드라마더군요. 기억이 점차 사라져가는 병, 알츠하이머를 앓는 할머니가 깨달은 사실은 특별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젊어서 미망인이 된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기억을 서서히 잃어 가면서, 남편이 죽기 전 함께 보낸 순간순간의 기억 전부가 삶을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 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김혜자 할머니의 내레이션이 아직도 마음속에서 울리는 듯합니다. 나의 나이는 고작 스물여덟밖에 되지 않았지만, 드라마를 보는 내내 할머니의 눈을 빌려 인생을 성찰해볼 수 있었습니다. 12 시간 남짓한 짧은 시간에 인생의 교훈을 배운 셈이니 몇 십 년을 아낀 것 아닐까요? 당신도 분명 나와 같은 생각을 했으리라 믿습니다.
훗날 나이가 들어 나의 기억과 당신의 기억이 희미해져 갈 때,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기억이 점점 늘어날 때, 그중 ‘조금 덜’ 희 미하고 ‘조금 더’ 선명한 기억 덕분에 ‘살아서 좋았다’는 말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나와 당신 사이의 기억 때문이면 더 기쁘겠습니다. 과거와 미래에 붙잡혀 우리의 ‘오늘’에 대한 기억을 뺏기지 말아요. 당신에게 내가, 내게 당신이 준 기억이 서로의 버팀목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 편지가 오늘, 당신에게 따뜻한 기억으로 남길 바라며 이만 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