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입학 전, 나는 외가에서 지낸 적이 있다. 어느 날 외할머니와 함께 동네 우물가 근처의 한 집을 찾았다가, 주인이 부재중이라 그냥 돌아 나오게 되었다. 그때 할머니는 집 벽에 걸린 그림 액자를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저 그림을 그린 분 말이다, 우리 집안사람이야. 국전에서 대통령상도 받았지. 그림을 정말 잘 그리셨어. 지금은 미국에 사신다지.”
그 말은 어린 나에게 작은 씨앗처럼 남았다.
나는 아직도 초등학교 시절의 생활통지표를 모아두고 있다. 가끔 펼쳐볼 때면, 유독 눈길이 가는 문장이 있다. 1학년 가정 통신란에 적힌 평:
‘.. 특히, 미술에 능숙합니다.’
부모님 외에도 누군가 내 재능을 알아봐 준 첫 기억이었다. 그 보답이라도 하듯, 군 종합 학예발표회 사생화 부문에서 5, 6학년 연속 특선을 차지했다. 형제 중에서도 유독 나만 그랬으니, 혹시 외가의 그림 유전자를 내가 독차지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중학교는 부산에서 다녔다. 방과 후 친구와 함께 미술부에 등록하러 갔다가, 봉변(몽둥이 얼차려)을 당했던 기억이 있다.
“그림 배울 생각일랑 다시는 하나 보자!”
부모님이 하라는 공부나 하지, 그림 따윈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땐 화가 나서 결기를 다졌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후회가 앞선다.
영국의 학자 매트 리들리는 저서 『본성과 양육』에서 말했다. ‘유전자는 자궁 속에서 신체와 뇌의 구조를 지시하지만,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자신이 만든 것을 해체하거나 재구성한다’
그 시절, 좋은 선배나 자상한 선생님을 만났더라면 나의 천부적 재능이 한껏 만개했을지도 모른다.
군 입대 즈음, 고향 집에서 산수화가 그려진 연하장을 발견한 적이 있다. 켄트지 전지에 4HB 연필로 재미 삼아 따라 그려보았다. 아버님께서 보시고 어느 날 표구까지 해 방문 위에 걸어두셨다. 습작임에도 그렇게 흐뭇해하시다니, 놀랍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80년대 초, 부모님이 대만 여행을 다녀오시며 내게 뜻밖의 선물을 주셨다. 중국어로 된 산수화 기법 책과 12색 물감인 봉채였다. 당시 나는 서울의 한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그림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제는 간간이 그림도 그려보라는 부모님의 속 깊은 배려가 선물 되어 내 가슴에 안겼다. 그럼에도 나는 그림을 배우려는 의지가 절실히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핑곗거리가 거미줄처럼 시야를 가릴 뿐이었다.
십여 년 전 귀향할 때라도, 봉채로 채색한 산수화 한 폭을 부모님께 보여 드렸더라면, 짙은 아쉬움이 남는다. 살아 계실 때, 자식 둔 뿌듯함과 얼굴 가득한 웃음을 한 번이라도 드렸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이라도 내가 그림을 배우려는 이유 중 하나는, 그 숙원을 풀기 위함이다. 인간 존재의 참된 의미는 가치를 창조하고,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데 있다고 했던가. 무의미한 것에 시간을 허비하려는 타성을 극복하려는 마음이 그 두 번째다.
그래서 오늘, ‘마지막 숙제’라는 마음으로 붓을 들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