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집 대문에 들어서려면 집 앞의 텃밭 왼쪽으로 돌아가야 했다. 텃밭은 고샅길과 구분하기 위해 돌무더기로 가장자리를 낮게 둘렀는데, 그 모퉁이에 있는 섬돌은 품격이 달랐다.
한때, 축담에 있으면서 사람들의 오르내림을 묵묵히 거들던 때도 있었다. 대문을 나와서는 제사가 끝나면 제삿밥을, 명절날에는 약간의 먹거리를 그 위에 올렸다. 그뿐만 아니라, 할머니가 그 섬돌에 올라서서 우리를 배웅하던 자리이기도 했다.
우리 형제는 큰집에 심부름을 자주 갔다. 얼굴이 달처럼 동그랗고 환한 웃음이 인상적이던 할머니는 늘 일을 손에 달고 사셨다. 그럼에도 모시 적삼이나 의복은 정갈하게 다려 입으셨고, 빗어 넘긴 머릿결부터 은비녀와 버선발까지 언제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집에 돌아가려고 나설 때면, 할머니는 우리의 손을 붙잡고 마루에 앉히셨다. 주위의 눈을 피해 가며 닭장에서 계란을 꺼내 축담에서 먹도록 했다. 초등학교 시절, 날계란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지만, 여분의 계란은 호주머니에 넣어주기까지 하셨다. 챙기는 마음이 따끈한 계란과 어우러져 한동안 식지 않았다.
할머니가 모시를 삼으시는 모습은 자주 보아왔다. 앞으로 끄집어낸 전짓다리(모시 틀) 사이에 두툼한 모시 다발이 걸쳐있었고, 한 올 한 올 가려 입으로 물고 무릎 위 살에 비벼, 옆 광주리에 날아갈 듯 돌려 앉히셨다.
나도 해보겠다며 허벅지가 나오도록 바지를 걷고 앉았다. 할머니처럼 살갗 위에 문지르다가 솜털에 말려 기겁하고 물러섰다. 할머니는 허리를 숙여가며 깔깔 웃으셨다.
어렴풋이 들려오는 ‘싹둑싹둑’ 소리에 실눈을 떴다. 희미한 등잔불을 켜놓고 떡가래를 써는 할머니가 계셨는데, 한 분은 우리 머리맡에 자리하고, 또 한 분은 굽은 허리를 벽에 기대 썰고 있었다. 그믐날, 큰집 큰방에서 사촌들과 한 이불 덮고 잤다. 할아버지 주무시는 아랫목에 콩나물 뿌리처럼 뻗은 발, 더 자라는 할머니 말씀이 정겨웠다. 그러나 날이 밝으면, 먹을 떡국과 세뱃돈 생각에 쉽게 잠이 오겠는가.
중학교 다닐 때였다. 큰방에 할아버지 내외가 같이 계셨는데, 당돌하게 두 분께 물어봤다. “두 분이 처음 만났을 때 느낌이 어땠어요? 할머니가 참 예쁘지 않았어요?” 두 분은 약속이라도 한 듯 파안대소하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할머니가 시집왔을 때 할아버지는 누이들만 많고 외아들이셨는데, 같이 사시면서 슬하에 아버지 형제 네 분과 고모 두 분을 두셨다. 할아버지께서 가족이 다 모이는 자리이면 항상 하시는 레퍼토리가 있었다. 남들에게 드러내고 자랑은 하지 않았지만, 속내는 이랬다.
“내 손자만 해도 열한 명이나 되네!”
할머니가 우리 곁을 떠나던 날은 어느 늦가을이었다. 가을걷이가 다 끝난 벌판은 공허했고 하늘은 빙청(氷淸)이라 얼음처럼 맑았다. 선소리꾼의 요령과 선창이 앞서나가고 상여꾼들의 후렴, 구슬픈 곡이 뒤를 따랐다.
꽃상여 위를 넓게 두른 앙장은 할머니 모시 적삼처럼 시리도록 흰빛을 발했다.
당일 탈상하고 대문을 나서는데 섬돌 위에 할머니 신발과 유품들이 태워지고 있었다. 바람이 등 뒤에서 불어, 타다만 재가 길 앞에 다투어 날렸다. 등 뒤에 온화한 서기(瑞氣)를 왜 못 느끼겠는가.
‘할머니! 우리 걱정 마시고, 이젠 편히 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