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큰집 마을 어귀에 막 들어설 때였다. 갑자기 굵어진 빗줄기가 ‘우두둑’ 온몸을 두들겨 패듯 쏟아졌고, 사촌 누나들은 앞다투어 내달렸다. 어둑한 저녁 무렵, 길옆에는 불어난 개천물이 콸콸거리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울어버렸다.
누나들이 되돌아와 나를 내려다보았다. 하늘은 먹장구름으로 가득 차고, 빗방울은 매주 콩처럼 뿌렸다. 누나들은 작은 보자기로 내 머리를 가린 채 손을 잡고 감나무 아래로 뛰었다. 겁에 질려 우는 나를 다독거리며 잠시 숨을 돌렸다.
다시 개천 위 다리를 건너 우리는 큰집으로 달음박질했다. 천둥이 계속해서 우리 뒤를 따라붙었다.
일곱 살 때 이전에는 비가 그렇게 무서운 줄 몰랐다. 뇌성과 번개에 땅바닥이 뒤흔들리고, 빗방울이 그렇게 아프다고 느껴본 적은 처음이었다.
자다가 눈을 떠보니, 식구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밖에는 폭우가 쏟아지는 듯 엄청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불길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진열장이 있는 마루로 나가보니, 아버님이 비단을 골라 큰 보자기에 싸고 계셨다. 형과 동생은 옷을 바삐 갈아입고, 엄마는 부엌에서 살림살이를 정리하는 듯 그릇 소리가 들렸다.
짐을 잔뜩 어깨에 메고 집을 나서는 아버님, 나는 책가방만 챙겨 들고 뒤를 따랐다. 폭우가 휘몰아쳐 우산은 펼칠 수 없었다. 그렇게 한밤중, 식구들은 어둠을 뚫고 높은 지대에 있는 큰집으로 대피하고 있었다.
나는 가면서 자꾸만 뒤돌아봤다. 엄마와 형제들이 제대로 뒤따라오는지 걱정이 됐다. 아버님은 내가 뒤처지자, 재촉하며 개천 가까이 가지 말라고 거듭 말씀하셨다.
아버님은 일제 강점기 때, 마을 뒤 저수지 둑이 터지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으셨다. 이후 보강공사를 하여 큰 사고는 없었지만, 하천 제방이 자주 터졌다. 제방이 붕괴하면, 우리 가게 마루와 부뚜막은 차오른 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때면, 어머님은 집 바깥에 화로를 피워 식사는 거르지 않았지만, 나는 방과 후 부엌 물을 세숫대야로 퍼내야 했다.
나는 여름이나 가을에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우울해지기까지 했다. 내가 4학년 가을 무렵, 우리 식구들은 신축한 콘크리트 이층 집에 입주하게 되는데, 이후 그런 증세는 말끔히 사라졌다. 오히려 폭우와 천둥이 내 몰아치면 나는 창문과 방 안을 뛰어다니며 스릴을 만끽했다.
그러나 호우도 만만치 않아, 늘그막에 날 또 찾아와 잠자는 트라우마를 일깨웠다. 아버님이 우리 곁을 떠나시던 날이었다.
연이틀 감정의 너울이 너무 커서인지, 나는 간헐적으로 어깨와 팔이 떨렸다. 벽에 기대어 바깥을 내다보니, 가늘던 빗줄기가 어느새 장대비로 변해 있었다. 기피 시설이다 보니 산으로 에워싸인 이곳은, 빗줄기가 거세지자 마치 수많은 사람들이 내지르듯 ‘우우’ 소리를 쳤다.
화장장 화로가 최고 온도까지 오르자, 부랴부랴 열기를 멈추기라도 하듯 가을 폭우가 퍼붓고 있었다. 불교에서 육신은 사대(四大)로 이루어졌다고 했다. 지수화풍 중 일부는 임종 때, 나머지도 화로가 꺼지면 홀연히 사그라질 것이다.
아버님을 회고해 보면 집념과 근면의 결집체였다. 유년기에 서당을 접하다 보니 퇴임 후, 서예에 심취하셨다. 그 열정이 만년에 이르러 서예 작품으로 영글었으니, 퇴계 선생의 <성학십도> 필사였다. 아버님이 서예를 취미활동으로만 하시는 줄 알았다. 10폭 병풍으로 만들어 내게 택배로 보내왔을 때, 펼쳐보고 그 정밀하고 세세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왜 많은 형제 중에 내게는 표구까지 해서 보내셨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제일 태극도’의 내용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무극이면서 태극이다. 움직이고 고요함에서 음양이 생겨나니, 변화하여 오행을 낳는다. 각기 남녀의 성이 있어 만물이 생화하는 것이니..’
아버님은 몸소 ‘태극도’ 생성 순리를 거슬러 오르고 계셨다. 곧 물과 불이라는 음양을 탈피하여 본향으로 나아가고자 하실 것이다. 온갖 상념들이 버거운 중량으로 나의 어깨를 짓눌렸다.
마침내 겹쳐 보이는 물상들 사이사이 그림자처럼 비가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