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길 위의 기억

한려수도

by 소운


여객선이 뱃고동 소리와 함께 노량 앞바다로 들어왔다. 선체 통로는 이미 내릴 준비를 마친 승객들로 북적였다. 따라오는 너울은 거친 숨을 내쉬고, 놀란 바닷물은 방파제 돌 틈 사이로 들락거렸다.

개찰을 마친 어른들은 선실의 빈자리를 찾느라 분주하지만, 나는 삼등실 표를 주머니에 넣고 2층 갑판으로 향했다. 중학생이던 나는 노량의 경관을 온전히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뚜우~뚜우~’


배는 천천히 노량해협을 빠져나갔다. 30분쯤 지나자 삼천포 시가지의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삼천포항도 내리는 사람보다 타는 사람이 더 많았다. 2층 갑판에서 바라보는 삼천포, 오랜 인연이 떠오르게 했다. 팔포와 벌리라 불리던 동네와 이웃의 해맑은 얼굴들.. 여섯 살 무렵, 외할아버지 따라 외가로 떠나면서 나는 이 자리에서 얼마나 울었던가!


수많은 배들이 정박해 있는 항구를 미끄러지듯 빠져나온 여객선은 서서히 방향을 돌렸다. 해안 쪽으로 돌출한 노산공원은 한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나무 사이로 산책하는 사람들, 벤치에서 그림을 그리는 아이도 보였다.


다음 기착지는 충무다. 그곳까지는 꽤 먼 뱃길이었다. 여객선의 2층은 맨 앞쪽이 조타실이고, 그 뒤로 여객(1등실), 연통, 갑판, 구조용 뗏목들이 모여 있었다. 바닥에 퍼질러 앉아 술판을 벌인 아저씨들도 눈에 띄었다.

여객선 1층 양쪽에는 좁은 통로가 나 있었다. 나는 열린 창문으로 여객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마주하고 누워 수다를 떠는 아주머니들, 중절모를 손에 쥔 채 벽에 기대어 잠든 할아버지, 아기를 품에 안고 젖을 물리는 엄마의 모습도 보였다.


배 후미에서 화장실 볼일을 보고 나오니, 하얀 포말이 꽤 멀리까지 퍼져나가고 있었다. 갈매기들이 낮게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갑자기 이층에서 뭔가 떨어졌다. 포말은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 이리저리 음미해 보더니, 결국 빈 술병을 토해냈다.


배 맨 앞쪽으로 갔다. 굵은 닻줄이 놓여있는 곳인데, 항상 내가 찾던 장소였다. 선수(船首) 난간에 머리를 내밀고 바닷물과 만나는 지점을 내려다보았다. 코발트 빛 바다가 예리하게 잘려 나가며 새하얀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선수가 바다를 가르는 모습이었다. 얼마 후, 선수는 사라지고 내가 바다를 가르고 있었다. 이런 무아경이 또 있을까!


다시 2층 갑판으로 올라갔다. 이제부터 한려수도의 진면목을 볼 차례였다. 한산도에서 여수까지의 물길인 한려수도는 바다라기보다 호수처럼 잔잔한 리아스식 해안으로, 들쑥날쑥한 연안선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불쑥 튀어나오다가 쭈욱 밀려들어가는 지형 끝자락은 메추리알 같은 어촌을 품고 있었다. 갯가 사람들은 어구 손질에 바빴고, 이따금 어장과 양식장을 알리는 하얀 부표들이 햇빛에 반짝거렸다.


반대편 오른쪽으로 발길을 옮기니, 조그마한 섬들의 퍼레이드가 벌어지고 있었다. 시선을 좌우로 돌리지 않는 한, 출품하는 섬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펼쳐졌다.

밤송이 섬부터, 우뚝 선 고양이, 드러누운 고구마, 그냥 섬도 있었다. 끝난 것 같으면 또 이어졌다. 분재보다 더 멋을 부리는 섬도 있지만, 갯바위 위에 바람으로 넘겨 빗은 해송과 빨간 경고등을 품은 암초도 참여하고 있었다.


뱃고동을 울리더니 배는 이내 충무항에 도착했다. 노량에서 출발한 지 서너 시간이 지났으니 배가 출출한 시간이기도 했다. 김밥 꾸러미를 머리에 이고 뛰어다니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승객들이 꽤 많았다. 나는 주꾸미 냄새가 싫어서 사 먹지 않았다. 견내량을 벗어나 거제도에 들리고, 칠천도를 지나면 바닷물이 완전히 달라진다.


70년대 중후반 정기 여객선이 줄줄이 운항을 중지한 뒤, 한려수도를 다시 본 것은 80년대 초반 수중익선 ‘엔젤호’에 승선했을 때였다. 예전에는 노량에서 부산까지 6시간이 걸렸으나 엔젤호는 3시간 남짓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안전상 이유로 밀폐된 선실에서 바깥을 조망할 수밖에 없었다. 편리함과 스피디한 생활 패턴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풍광과 맞바꿈을 한 셈이었다. 훗날, 요트 투어와 같은 한려수도 해상관광이 활성화되면, 꼭 그곳의 티켓을 끊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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