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에서 내려 호젓한 산행을 나섰다. 조그마한 홍예교를 지나, 산새와 매미 울음, 계곡의 물소리와 어우러져 비탈길을 올랐다. 엊그제 내린 비로 인해 이끼가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산길은 사람의 발길을 거부하지 않는다. 적당히 받아주는 여유가 그래서 좋았다.
촘촘한 나무들은 살가운 바람을 가리지 않고, 위로 뻗어 있지만 창공을 모두 탐하지 않는다. 취해도 지나치지 않는 절제가 몸에 배어 있는 듯했다. 녹음을 헤치고 소리 타고 내리는 계곡의 물, 내 정수리로 쏟아져 내려와 무심의 소(沼) 하단전까지 이르렀다.
일주문을 지나 또 다른 다리를 건너자, 왼쪽으로 돌계단이 하늘로 이어졌다. 조심스럽게 계단을 오르던 중, 왼편에 있는 누각이 눈에 들어왔다. 불경을 공부한 곳인 채진루(採眞樓)였다. 이 누각을 밑에서 우직하게 떠받고 있는 기둥들은 누각 마루와 대웅전 마당을 서로 맞물리게 하는 선한 조력자들이었다.
대웅전 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단정히 개어놓은 방석과 목탁, 맑은 향만이 빈 법당을 감돌고 본존불은 오는 객을 미소로 맞이했다.
명부전 앞에 이르니, 비구니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청아한 목소리로 독송하고 있었다. 연약한 몸매임에도 불구하고 어깨를 들먹이며 한적한 산사의 혼을 일깨우는 듯했다. 부탁받은 이의 업인가, 아니면 이승을 떠도는 이들의 업을 거두는 것인가.
마당 옆에는 사리탑이 조성되어 있었다. 법당에서 사리를 친견하던 때가 떠올랐다.
채진루는 오랫동안 묵혀두고 있었다. 본래의 기능을 복원하기 위해 내부를 크게 수리 중일 때다.
어느 날 주지 스님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났다. 방치된 문살의 틈에 중요한 것이 있으니 버리지 말라고 했다. 그저 꿈이려니 생각하며 잊고 있었다.
며칠 후, 다시 노승이 나타나 호되게 꾸짖었다. 그제야 주지는 뭔가 예사롭지 않다고 느꼈다. 버리려고 밖에 세워둔 창호 문의 문틈에서 아주 작은 종이 뭉치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사리 몇 과와 세필로 쓴 경전 두루마리 등이 들어 있었다.
고승의 법구를 떠난 한 줄기 빛이 탑의 상륜부를 타고 어디론가 흐르는 것만 같았다.
경내를 돌아보던 중, 대웅전 왼쪽 기둥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녹음이 산자락을 타고 내려와 저 멀리 수줍은 쪽빛 바다와 만나고 있었다. 이대로 머물고 싶었다. 눈을 감았다. 모든 잡념을 끊어낸 체, 깊은 숨결 속으로 한 올 한 올 물들어 갔다.
일주문에는 스님이 걷어버린 업들이 헤어진 거미줄로 남아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