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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탑(下)

가족이라는 의미

by 소운

아침 8시에 시작된 수술은 6시간 만에 성공적으로 끝났고, 이후 3시간을 더 소요해 마무리되어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CT 검사 결과 이상은 없지만, 안정을 위해 강제 수면을 유도해야 했다.

다음 날, 우리는 면회를 신청했다. 자가 호흡을 시도 중인데 호흡 부조가 지속되어 조금 더 지켜봐야 한다는 답변을 받았다.

늦은 저녁, 동생에게서 뇌부종이 심각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강제 수면과 함께 항 부종제를 투여 중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다음 날, 상태가 호전되지 않아 어머님은 계속 강제 수면 상태였다. 수술 후 5일째 되는 날, 병원에서 어머님의 강제 수면을 해제했다고 알려왔다. 저녁 7시에 가족 면회가 허용되었고, 우리는 외과 중환자실에 들어갔다.


어머님은 침대를 경사지게 세워 눈을 감고 계셨다. 머리에는 보호 망사를 쓰고, 정수리에는 가느다란 호스를 꽂은 모습이었다. 모니터에서 나온 선들이 어지럽게 몸에 부착되어 있고, 주삿바늘이 혈관에 꽂혀 있었다.

우리가 다가가자, 어머님은 실낱같은 눈물을 흘리셨다.


얼마나 아팠을까! 혼자서 외롭고 두려웠을 그 모습이 떠오르니, 내 가슴은 미어졌다. 우리가 손등을 어루만지자, 어머님은 약하게 반응을 보이셨다. 눈까풀은 하얀 거즈로 가려져 보이지 않는 모양이지만, “어머니”라고 부르자 고개를 돌리려고 하셨다.

이틀 후, 어머님은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동생이 오천 원을 보여드리며 물건을 사고팔 때 거스름돈이 얼마인지 물어보자, 어머님은 비교적 좋은 반응을 보이셨다. 가족들은 모처럼 안도하며, 차도가 있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십여 일이 지나자, 안도했던 마음도 잠시, 어머님은 다시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중한자실로 옮겨졌다.


그해 2월은 유난히 추웠고, 눈도 자주 내렸다. 실내 난방을 높인 탓에 복도 공기는 건조하고 답답했다.

“CPR팀, CPR팀은 외과 중환자실로 오시기 바랍니다.”


방송이 끝나기 무섭게 의사들이 급하게 뛰어 들어가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때마다 보호자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보호자 대기실에서 나와 복도를 거닐었다. 무기력하고 암울한 시간이 온몸을 짓눌렀다. 수술 결과를 낙관했던 것이 후회스러웠고, 뇌수술이 그렇게 만만한 수술이던가, 자책도 했다.

병원 앞 시계탑이 그날따라 내 발길을 붙잡았다. 함박눈을 맞은 시계탑은 마치 백발노인처럼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서인지, 시계탑은 내 마음 밑바닥까지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시간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듯, 어머님 병세도 더 이상 역행 없이 호전될 수 있을까? 묻고 또 물어봐도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걸음을 옮기다가 다시 시계탑을 바라보았다. 시계탑은 저만치 뒤로 물러서 있었다.

입원한 지 두 달 반 지난 어린이날, 어머님은 퇴원하셨다.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장충단로 도로변에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던 날이었다.

서울 동생 집에서 두어 달 요양하신 후, 아버님과 함께 본가로 내려가셨다. 한쪽 시력은 유지하셨지만, 수술 후유증으로 나중에 치매가 진행되었다.

가족들에게 밀려올 고난이 크고 깊음에, 시계탑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나 우리에겐 어떠한 역경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버팀목이 있었다. 그건 바로 가족이라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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