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운 Jan 24. 2021

한려수도

 뱃고동 소리와 함께 여객선이 노량 앞바다로 들어온다. 선체 통로에는 벌써부터 내릴 채비를 하는 승객들로 붐볐다. 따라온 너울이 거친 숨을 몰아쉬고, 놀란 바닷물은 축대 돌 틈 사이로 들락거린다.  

 개찰을 마친 어른들은 선실의 빈자리를 잡으려 허둥댄다. 나는 삼등실 표를 호주머니에 넣고 이층 갑판으로 올라갔다. 중학생 시절 노량의 전경을 고스란히 눈에 담으려 했다.    


‘뚜우~뚜~~’

 배는 서서히 노량해협을 벗어난다. 30분가량 지나 삼천포 시가지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삼천포항에서도 내리는 것보다 타는 사람이 많았다. 이층 갑판에서 오랜만에 둘러보는 삼천포.

 이곳에서 5년간의 인연이 떠올랐다. 팔포, 벌리라고 불리던 동네. 이웃의 해맑은 얼굴들. 여섯 살 무렵, 외할아버지 따라 외가로 떠나며 이 자리에서 나는 얼마나 울었던가!

 많은 어선들이 정박한 항구를 미끄러지듯 빠져나와 뱃머리를 돌린다. 해안에 접한 노산공원이 손에 와 닿을 듯했다. 나무들 사이로 산책하는 사람들. 벤치에서 그림을 그리는 소년은 나와 눈이 마주친다.    


 다음 기착지는 충무. 그곳까지는 꽤 먼 뱃길이었다.    

 

 여객선의 이층은 맨 앞쪽이 조타실이고 뒤를 이어 여객실, 연통, 노천갑판, 구조용 뗏목들 그리고 난간에 태극기가 게양돼 있었다. 우람한 연통에서 토해내는 매캐하고 시커먼 연기는 태극기에도 잔뜩 그을음을 남겼다. 뗏목 아랫자리에 앉아 술판을 벌이는 아저씨들. 어지간히 취한 듯했다.   

   

 여객선 일층 양쪽으로는 좁은 통로가 나있었다. 쌀쌀한 날씨 탓에 나다니는 사람이 드물었다. 여객실 안을 봤다. 마주 보고 모로 누워 수다를 떠는 아낙네들. 중절모를 손에 쥐고 벽에 기대 잠이 든 할아버지. 보채는 아기를 달래려는 엄마의 하얀 젖가슴이 있었다.    


 화장실이 있던 후미는 써레질을 하듯 하얀 포말이 멀리까지 뒤엉켜 나가고 있었다. 갈매기들이 낮게 끼웃거린다. 이층에서 뭔가 떨어졌다. 포말은 엉겁결에 받아, 노파가 잇몸으로 씹듯 요리조리 음미해본다. 도저히 못 먹겠는지, 토해 낸 빈 술병이 물 위로 떠 사라진다.


 배 앞쪽으로 갔다. 굵은 닻줄이 비좁게 놓여있는 이곳은 필답 코스 중 하나였다. 선수(船首) 난간에 머리를 내밀어 바닷물과 만나는 지점을 내려다봤다. 코발트 빛 바다는 예리한 칼날에 잘려나가며 새하얀 속살을 연이어 드러낸다. 선수가 바다를 자르는 것이다. 그러다가 선수는 간데없고 내가 바다를 자르고 있었다. 마침내 무아경(無我境)에 이른다.    


 갑판으로 다시 올라갔다. 이제부터 한려수도의 진면목을 느껴볼 참이다.     

 한산도에서 여수까지의 물길인 한려수도. 파란 하늘이 얼굴을 비춰보다 그만 내려앉았다.  남해안은 리아스식 해안이다. 들쑥날쑥한 연안선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우뚝 튀어나오다가 쑤욱 밀려들어가는 지형은 메추리알처럼 어촌을 품고 있다. 사람들은 어구 손보는데 바쁘고, 이따금 양식을 알리는 하얀 부표들이 햇빛에 반짝거렸다.    


 오른쪽으로는 섬들이 퍼레이드를 준비하고 있다. 나름대로 터득한 비법이 있다. 하나는 턱을 조금 들어서 멀리 본다. 또 하나는 고개를 좌우로 돌리지 않는 것이다. 출품하는 섬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전개된다. 배가 거꾸로 가지 않는 한.

 바구니에 담고 싶은 밤송이 섬부터, 우뚝 선 고양이. 드러누운 고구마. 그냥 섬도 있다.  한두 발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자태를 뽐낸다. 끝난듯하다 또 이어진다. 분재보다 더한 멋을 부리는 섬, 갯바위 위에 바람으로 넘겨 빗은 해송. 그리고 빨간 경고등을 앞세우고 툭툭 불거진 암초도 참여하고 있다. 무인도에 대한 품평은 뱃고동 소리에 막을 내린다.  

  

 충무항에 들어왔다. 노량에서 부산까지 6시간 소요됐으니 승객들이 출출할 때다. 머리에 김밥 꾸러미를 이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면, 일이층에서 내미는 손들이 꽤 있었다. 나는 주꾸미 냄새가 싫기도 했지만 곧 맞이할 멀미 걱정에 꺼려했다. 견내량을 벗어나 거제도에 들리고, 칠천도까지 벗어나면 바닷물이 싹 안면을 바꾼다.   

 

 이제 갑판 위에서 내려와 슬그머니 일층 승객실 빈자리로 찾아든다. 경험상 가장 무던한 곳으로 알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산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