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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운 Feb 02. 2021

애물단지

 회사에 출근하기 전, 영등포에서 새벽 운동을 하던 시절이었다. 5시쯤 시동을 걸어놓기 위해 집 앞 승용차로 갔다. 키를 꽂으려고 하는데 아래쪽이 뭔가 이상했다. 허리를 숙여서 자세히 들여다봤다.

“아니.. 이게 뭐야? 어떤 OO가!”

 쥐회색(mousy gray) 도장의 깊은 속까지 날카롭게 그어놓았다. 그런데 문짝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왼쪽 펜더부터 앞, 뒤 문짝 그리고 뒤 펜더까지. 상어 옆구리를 칼질하여 하얀 속살이 뒤집어 드러난 것 같았다. 두 손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니, 내가 무얼 잘못했다는 거야!’    


 주위 차량을 둘러봤다. 내차만 그런 것을 봤을 때, 작심하고 결행한 짓이다. 주차한 곳은 다세대 주택 담장 옆이었다. 그 집 반 지하에 사는 사람? 아니면 그 주택이나 부근에 사는  사람? 울화통이 터졌다. 그때는 블랙박스가 없던 시절이었다.    


 일반적으로 건너편 집이라도 도로 옆이면 주차가 가능했다. 물론 출입에 방해가 돼서는 안 된다.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이른 새벽에 시동을 걸어놓는 것이 그들의 수면에 방해가 된다는 항변일 것이다.

 그때는 아침에 공회전하는 것이 크게 문제를 야기하지 않았다. 대부분 차량의 기화기가 카뷰레터 방식이기 때문이다. 추운 날에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RPM이 정상적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불만이 있으면 사전에 쪽지라도 남겨서 수위조절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방범등 아래에 있는 남의 차량을 가차 없이 훼손하는 대담성에 기가 찼다. 방범(防犯) 하지 못한 방범등은 그날따라 초라해 보였다.   

    

 의식거주(衣食車住)의 바람이 일던 시절. 소하리 출하장에서 직접 인계받은 나의 첫 애마 프라이드! 신생아를 보듬은 마음이었다. 승차 후 코를 스치는 냄새!

 차에 대한 나의 애정은 대단했다. 이태리제 쌍 클랙슨 장착으로부터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사이클론, 선팅, 핸들과 시트 카버 심지어 룸램프와 핸들은 콩코드의 것으로 교체하기도 했다.

 일요일마다 직접 세차를 하고, 한 달에 두어 번 정도는 왁스칠을 했다. 이렇게 나의 각별한 관심을 받아 온 애마가 이른 새벽에 처참히 난도질을 당한 것이다. 무방비 상태에서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하다니!   

  

 다음날 나는 상도동에 계시는 작은 아버지의 빈 차고에 내 차를 집어넣었다. 등 뒤로 들리는 작은 어머니의 만류에도 나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 주차했던 자리를 내려다봤다.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편리함 이면의 불편함을 수용할 준비가 돼 있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주차문제로 서로 반목하고, 비열한 방식으로 화풀이를 하는 이웃이 정말 싫었다.

 또 하나는 아직 전세를 사는, 평사원인 내가 자가용을 가진다는 것이 과분하다는 자성론이었다. 몇 달 뒤 아파트로 이사 가기 전까지는 차를 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다음날부터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였다. 서점에서 책을 샀다. ‘선(禪)의 황금시대’와 ‘명상 비법’이었다. 자리가 없으면 서서라도 읽으며 몰입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의도에서 철산동을 오가는 시간은 더 짧아지고, 덤으로 주차시비로부터 자유로움을 얻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굳건했던 마음에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회사 직원들이 차를 어떻게 했냐고 묻는데 답변하기가 궁색했다. 운행을 하지 않더라도 자동차세와 보험료는 꼬박꼬박 낸다는 사실. 차는 소모품이기에 흠집은 불가피하다는 생각들이 군불을 지폈다.     

 

 보름 정도 지나서야 긁힌 마음은 서서히 봉합되고 있었다. 차를 갖고 나와서 동네 카센터에 맡겼다. 실낱같은 흔적만 보일 뿐 깨끗하게 마무리가 되어 있었다.    


 그 날 이후로 승용차를 새것으로 바꾸면 일체의 액세서리를 하지 않는다. 차의 정비 이력이나 부품 교환 시기는 꼼꼼히 따지지만 그 외는 관심사 밖이었다. 세차 좀 하고 다니라는 아내의 잔소리도 서너 번 들어야 한 번 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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