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을, 집 근처에서 친구와 흙장난을 치며 재밌게 놀고 있었다. 갑자기 막내 외삼촌이 나타나 내 손을 잡아당겼다.
“동아! 네 엄마가 온다. 빨리 가보자!”
어리둥절한 나는 옷에 묻은 흙먼지만 대충 털며 그를 따라나섰다. 가파른 마을 뒷길을 뛰어올라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에 도착했다. 잔디가 무성했던 그곳엔 소나무 서너 그루가 조용히 해풍을 맞고 있었다. 언덕 아래부터 멀리 보이는 쪽빛 바다의 해안까지 꽤 넓은 들녘이 이어졌다.
외삼촌은 소나무를 껴안고 오르다 뭔가를 발견한 듯했다.
“야! 저기를 봐라!”
따가운 햇살 아래, 누렇게 익은 벼 이삭이 황금 군무를 펼치고 있었다. 좁다란 논두렁길이 벼 이삭 사이로 드러났다가 숨으며 술래잡기 놀이를 하듯 했다. 그 길을 따라 날리는 옷자락을 잡고 사뿐사뿐 걸어오는 이가 있었다. 고운 한복 차림의 여인이었다.
‘저분이 내 엄마라고?’ 믿기지 않았다.
여인이 언덕배기 가까이 모습을 드러내자, 난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등 뒤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앞만 보고 바삐 걸었다. 그날따라 길가에 있는 탱자나무 덩굴이 왜 그리 길던지.
마당 한쪽에서 놀고 있던 내게 외숙모가 다가와 외할머니가 찾는다며 알렸다. 큰방에 들어서니 아랫목에 그분이 앉아 있었고, 옆에는 외할머니와 외삼촌들이 있었다.
“이놈아! 네 어미다. 인사드리지 않고서는.”
외할머니는 나무라는 듯 말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올려다봤다. 예전 삼천포 선착장에서 마지막으로 본 엄마였다.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참 예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리 오너라. 한 번 안아보자.”
하지만 엄마 품 안으로는 쑥스러워 들어갈 수 없었다. 서너의 번 실랑이 끝에 어른들은 다시 하던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틈에 난 방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멀리 가진 않았다. 큰방 앞 마루에 앉아 만들다 만 방패연을 다듬었다.
연이 완성되자 난 친구들이 모이는 뒷집으로 갔다. 골목길을 뛰어가면서 나는 속으로 외쳤다.
‘와~ 내게도 예쁜 엄마가 있다!’
이 뿌듯함을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친구들은 동네 형들과 함께 연싸움 준비에 바빴다. 나도 길가에 버려진 유리 조각을 주워 잘게 부수고, 밥풀과 섞어 비료 포대 종이에 넣고 연실을 풀질했다.
동네 어귀에서 한바탕 연싸움을 벌이고 집에 돌아오니 분위기가 썰렁했다. 큰방 문을 열어보니 아무도 없었다. 식구들이 모두 배웅 나간 듯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이토록 빨리 떠날 줄 알았더라면 그냥 집에 있을걸,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넉넉한 외할머니의 눈길과 풍요로운 주위 환경 덕분에 서운함은 덜했다. 내게도 예쁜 엄마가 있다는 사실을 가슴속에 숨겨두고, 얼굴을 잊을 것 같으면 혼자 꺼내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