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두막이 있던 자리

by 소운

큰방에 펴진 이불속으로 들어가니, 훈훈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며 솜털처럼 가벼워졌다. 잠시 눈을 붙였을까. 외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동이 어디 있냐?”


함께 한약방에 가서 탕약을 짓고, 외할아버지 등에 업혀 돌아오던 길이었다.

“할아버지, 이 약 쓰지? 나 안 먹을래.”

“그렇게 쓰지 않다.”

“그래도 싫어.”

“그 참!”


“허허! 어쩌면 그렇게 기억을 잘하냐?”

외할아버지는 담뱃대를 한 손에 쥐고,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나를 바라보셨다.

“집에 와서도 실랑이를 벌였죠?”

“그러고 보니 어렴풋이 생각이 나기도 하는구나. 네가 예닐곱 살 때 다부졌지만 고집도 세었지.”

고등학교 여름방학 때, 나는 외할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야산에 있던 원두막을 찾아갔다. 얼굴에 주름은 늘었어도 인자한 모습은 변함이 없었고, 나의 어린 시절 일들을 여전히 기억하고 계셨다.

그해 여름, 원두막은 아름드리 단감나무를 양쪽으로 의지해 세워져 있었다. 겉보기보단 튼튼했다. 로켓트 배터리를 동여맨 트랜지스트 라디오에서는 구수한 가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옆에는 목침과 부채, 막걸리 병이 놓여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막걸리를 즐기셨는데, 가정에서 술을 빚는 것이 금지된 시절에도 몰래 빚어 보관하셨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볏단을 마당 옆에 쌓아두곤 했다. 밑동을 바깥쪽으로 해서 둥그렇게 쌓아 올린 후, 마지막에는 이엉으로 둘렀다.

외할아버지는 막걸리를 넣은 병을 볏단 깊숙이 밀어 넣었다. 일을 마치고 들어오시면, 정확히 찾아내어 한 사발 드시곤 했다. 나도 호기심에 찾아봤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해거름이면 짙어지면, 외할아버지는 골라놓은 수박과 참외를 바지게에 지고 집으로 돌아가실 것이다. 저녁 식사 후에는 외할머니가 잘 다듬어서, 이런 새벽이면 읍내 시장으로 팔려 가는 모습이 어른거렸다.

“수박은 아직 덜 익었으니 참외나 따 오너라.”


외할아버지의 말씀에 원두막을 내려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몰라보게 큰 상수리와 밤나무 사이로 매미 울음이 개울물처럼 쏟아졌다. 산골짜기를 건너오는 뻐꾸기 울음소리도 들렸다. 외할아버지와 함께 이곳에서 나무를 하던 때가 있었는데, 그 울음소리는 추억의 끝단을 부리로 꺼내는 듯했다.

회사에 다닐 때 원두막을 다시 찾았다. 참외와 수박이 영글던 밭이랑은 무성한 잡초에 자리를 내주고, 원두막마저 마법에 걸려 허물어져 있었다. 근처에는 외할아버지가 외할머니와 함께 깊고도 곤한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저 때문에 애 많이 쓰셨죠.”


이 말씀을 꼭 전해드려야 했는데, 철이 덜 들었다. 그 시절을 다시 돌려놓고 싶지만, 결국은 추억으로만 남았다. 지금이라도 이 마법을 풀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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