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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운 Feb 15. 2021

일곱 방에 멈춘 재능

“너희들 중에 그림 잘 그리는 애 있나?”

 담임선생님의 뜬금없는 물음에 우리는 서로 얼굴을 번갈아봤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저요!”

 선생님과 급우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모아졌다.

“이 수업 마치고 교무실 내 자리로 와!”   

 

 교무실은 언제 와도 잘못해 불려 온 것처럼 긴장됐다. 생물 선생이던 담임선생님 자리를 찾아갔다.

“왔어? 여기 내 자리에 앉아서 이것 좀 그려봐라”

 생물도감에 있는 화초 몇 점을 선생님의 지도교안에 그려 넣는 것이었다. 펼쳐진 지도교안에는 여기저기 그리다가 지운 흔적들이 보였다.  

   

 얼마 후 선생님이 자리로 돌아왔을 때, 나는 이미 다 그린 뒤였다. 선생님은 자세히 살펴보더니 갑자기 교안을 집어 든 채 큰소리를 내질렀다.

“이야~ 하하하”

“보소, 강 선생! 이 애가 그린 것 좀 봐!”

 옆자리에 앉아있던 선생들에게 자랑하며 신이 났다. 종례시간에 보아왔던 그 엄한 모습과는 분명히 거리가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우리 반 미화반장이라는 감투를 머리에 얹었다.    


 중학교 입학 후 새로운 환경에 조금씩 적응이 돼가고 있었다. 그래도 시나브로 불어오는 항구의 바람, 중저음의 뱃고동 소리. 애써 잊으려 하는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순박하던 졸업반 친구들 얼굴이 떠오르기도 하고, 부모님과 고향집이 생각나면 눈물이 핑 돌았다. 군내 종합 학예발표회에서 사생화부 특선이라는 짜릿한 추억도 떠올랐다. 5, 6학년 연달아 따냈던 쾌거였다. 도(경남) 경시 대회에서만은 늘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림을 체계적으로 배워 보고픈 마음이 생겼다.

   

 어느 날 방과 후 같은 미화반 친구와 함께 4층에 위치한 미술부를 찾아갔다.     


 아직 출입문이 열려 있었다. 우리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지럽게 서있는 이젤들, 각종 화구 및 석고상들이 가슴을 설레게 했다. 이학년 선배 두 명이 우리를 의아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저.. 여기 미술부에 들려고 왔는데요.”

 자기네끼리 얼굴을 마주 보고 뭐라고 말을 하더니 그중 한 선배가 다가와 물었다.

“그림 잘 그려?”

“아니, 그냥 배워 보려고..”

“그래? 저기 있는 들통을 하나씩 들고 내려가 물부터 길어 와!”

 우리는 함석 들통을 가지고 계단으로 내려와, 교사 뒤편에 있던 급수대로 갔다. 순순히 가입을 받아주는 선배가 고마웠다.


 가득 채운 물을 들고 네댓 번 오르내리니 이게 장난이 아니었다. 마지막에는 계단에서 조금 쉬었다가 미술실로 들어갔다. 선배는 우리 마음을 이미 읽고 있었다.

“야~ 동작들 봐라, 기합이 빠져가지고!”

“둘 다 바닥에 엎드려뻗쳐!”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찬 바닥에 엎드렸다. 봉걸레 막대기로 세대씩을 얻어맞았다. 몸놀림이 빨라졌다. 걸레로 바닥을 닦고 또 물을 길어 날랐다.    


 급수대 앞에서 만난 우리는 뭔가 잘못돼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무림의 고수에게 한 수 배우고자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아니다. 장인에게 비법을 전수받으러 온 것 또한 아니다. 얻어맞아가면서 하는 이 꼴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우린 탈퇴하기로 의기투합했다. 그냥 도망쳐버릴까 했지만 학급까지 말해버렸으니 후한이 두려웠다.   

 

 청소를 다 끝낸 후 선배에게 어렵게 말했다.

“우리 그냥 탈퇴하려고요..”

“뭐? 이 자식들이 장난치려 왔나! 그냥은 못 보내준다. 몽둥이 7방을 맞고 너희들 맛대로 해라.”

 봉걸레 막대기로 내려치는데 아까보다 강도가 달랐다. 깡마르고 인상 더럽던 선배. 어디서 그런 괴력이 나는지 친구부터 사정없이 후려친다. 내 차례였다. 엉덩이가 찢어지는 아픔은 서너 대 이후부터 얼얼하며 덜 고통스러웠다.     


 가방 들고 계단을 다 내려가니 쑤시고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난간을 붙잡고 가까스로 내려왔다. 뒤따라 내려오던 친구를 보니 안쓰러웠다. 내가 바람을 잡았기 때문이다.

“너, 우는 거야?”

 고개를 푹 숙이고 내 앞을 지나갔다. 미술실을 쳐다보며 어금니를 부드득 갈았다.

“다시는 미술실을 쳐다보나 보자. 빌어먹을!”    


 이후 졸업 때까지 그림 배울 생각은커녕 재능이 있다는 사실조차 애써 잊고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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