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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운 Apr 05. 2021

두 번 산다


“밟아라, 밟아!”

 양반이 대청마루에서 하인이라도 부리듯 뒷좌석 친구가 내 질렸다. 밖에는 초겨울 저녁 비가 아스팔트 위를 야금야금 적시고 있었다.    


 그날은 읍내 예식장에서 친구 결혼식이 있었다. 같이 갔던 동네 친구들이 다시 돌아와 정류장 옆 다방에 들렀다. 피로연에서 반주를 곁들인 우리는 차 한 잔 후 헤어지기로 했다.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들어오는데, 안면이 있다고 느낀 한 친구가 손짓을 했다.  

“야! 너 유 OO 아니야?”

 초등학교 졸업 후 처음 보는 동창이었다. 부친이 마을에서 알아주는 선주(船主)였기에 용돈 씀씀이가 우리와는 비교 불가였던 기억이 났다.

 자기 동네 친구가 내일 결혼을 앞두고 있어 그 집에 간다는 것이다. 유 친구가 말하는 친구란 우리와 친하지 않으나 역시 동창이었다. 부산에 살고 있던 유 친구는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부친의 승용차를 운전해서 시골까지 내려온 것이다. 그 시절에는 자가용 운전자가 흔치 않았다.  

    

 우리는 승용차도 타볼 겸해서 그 친구가 산다는 읍내로 다시 들어가기로 했다. 동네 친구들이 한꺼번에 다 탔다. 약속한 대로 헤어지지 않고 친구를 따라나선 게 화를 자초한 셈이다.   

 새한자동차 제미니였다. 호기심과 부러움으로 반들거리는 차체를 쓰다듬기도 했다. 뒷좌석에 세 녀석이 들어가고, 운전석 옆에는 내가 앉았다.  

   

 야산을 이리저리 돌아 마침내 아래로 시원하게 뻗은 길 초입에 이르렀다. 부산 친구는 뒷좌석 친구와 맞장구라도 치듯이 가속 페달에 발을 올렸다. 직선 도로 끝은 농수로와 교차하는데 그곳은 작은 다리가 놓여있다. 그 지점을 넘어서면 좌측으로 70도가량 급커브 길이다. 나는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음악 테이프를 골라 카 오디오에 넣고 있었다.    


 다리 위를 미끄러지듯 올라서자 무심결에 전방을 내다봤다. 헤드라이트에 비친 오른편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평소와는 다르게 보였다. 그다음 의식의 흐름은 슬로비디오를 보듯이 시간 굴곡 현상이 일어났다.     

‘플라타너스는 오른쪽으로 스쳐 지나가야 하는데, 왜 차 쪽으로 다가오지? 이러면 안 되는데..’


어떠한 통증이나 공포심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인지가 단절된 시공간.

진공묘유!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 내 팔! 으윽!”

 아득한 동굴 끝에서 가물거리는 소리를 영민한 청각이 앞서 받아냈다. 이를 불쏘시개로 의식의 불이 다시 지펴지기 시작하고 마침내 눈꺼풀이 움직였다.  

‘이 불빛은  뭐지?

 찬찬히 살펴보니 차 천정의 룸 램프를 깔고 앉아 있었다.

‘아니? 지금 사고를 당한 거야?’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창 쪽으로 몸을 내 던졌다. 먼저 나온 친구들이 손을 내민다. 내 뒤에 한 녀석을 마지막으로 모두가 차를 빠져나왔다.    

 

 다 살아 있었다. 중상자마저 없었다. 다만 나 혼자 인중과 턱 부분에 피가 나고 있었는데,  카 오디오를 조작하려다가 차 대시보드에 충돌한 모양이다.      

 사고 현장은 처참했다. 다리 건너 첫 번째 가로수는 두 뼘 가량 하단부만 남기고 부러졌다. 두 번째 나무 또한 찢어지면서 반쯤 젖혀졌다. 차는 세 번째 나무를 긁은 후에야 뒤집혀 논바닥에 전복됐다. 논은 도로보다 무릎 정도 아래에 있었다.  

   

 우리는 현장을 빨리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정 여러 명이 뒤집힌 승용차를 들어 올리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부러진 가로수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시동을 걸어보니 스타트 모터의 맥 풀린 소리뿐이고, 불이 날 듯 엔진룸에서는 연기가 자욱했다. 본닛, 라디에이터 그릴, 우측 전조등이 엔진룸으로 밀려들어오고, 우측 펜더와 루프까지 심하게 손상되어 있었다.   


 차 통행량이 많지 않던 시절이지만, 읍내로 가던 택시가 경찰서에 사고를 알렸다. 구급차 소리가 들리자 우리는 건너편 언덕에 몸을 숨겼다. 친구 혼자 조서를 쓰는 것이 번거롭지 않다는 우리의 배려였다.   

 견인된 승용차는 다음날 폐차 처리되고, 친구는 경위서와 가로수 보수비용을 부담한 후 부산으로 돌아간 소문이 들렸다. 경찰서에서 출두하라는 통보가 왔다. 모두가 멀쩡한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은 듯 손으로 몸을 툭툭 쳐보기도 했다.       


 녀석들이 모이면 너 나할 것 없이 너스레를 떤다.

“총각들을 기리는 위령탑이 세워질 뻔했네!”

“우리가 계속 살아가고 있는 게 맞아?”

“가로수가 영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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