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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운 Apr 20. 2021

제3국

 땅두릅을 채취하다 조금 쉬기로 했다. 접이식 의자에 앉아 텀블러 커피를 꺼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산에는 온통 되돌릴 수 없는 봄이 왔다.

 피부에 새살이 돋아나듯 연초록이 산을 물들인다. 소나무를 비롯한 상록수는 내색하지 않지만 활엽수들이 대견스러운 모양이다. 늘 푸르다하나 겨우내 시린 바람 견뎌내며 잎들이 까칠해졌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보니 이 밭의 산 어깨가 보인다. 산 이름이 특이하다. 십장생에도 오르내리는 동물. 사슴의 머리를 닮았다는 녹두 산이다. 삼천포에서 돌아오던 날, 어느 한 지점에 이르자 사슴의 두상이 보였다. 옛사람들의 미학적 네이밍에 찬탄할 수밖에 없었다.   

 

 맞은편은 산성이 있는 대국산인데, 이 두 산을 연결하는 여러 산봉우리들이 뒤쪽으로 둥그렇게 부챗살처럼 펼쳐있다. 자연히 수원(水源)이 발달하여 큰 저수지가 오래전 형성되고, 촌락이 꿈결처럼 수변을 끼고돈다.

 물은 좌에서 우로 흘러내지만 밭에선 보이지 않고 소리만 요란스럽다. 물줄기가 굵어 예전에 한내라고 불렀다. 흘러내린 물은 넓은 들을 적시다 노량해전으로 알려진 관음포구로 스며든다.   

  

 한내가 물소리로 내게 묻는다. 이 물에서 태어나 대양을 누비다 되돌아온 시간들을 반추해보라고.    

   

 1국을 복기하자면 기풍이 호탕하여 남들이 붙이면 젖혔다. 상대방이 맞받아 젖혀오면 되받아 응수했다. 행마는 기민하고 수상전(手相戰)에 승률이 높았다. 때론 두터운 벽에 좌절하기도 했지만, 과분하지 않은 집과 세력으로 대응했다. 판세가 유리했지만 IMF 환란 변수에 계가 하지 못했다.    


 2국에서는 경험을 바탕으로 안정을 택했다. ‘포석은 경쾌하게 행마는 힘차게’가 슬로건이었다. 아직은 기백이 넘쳐 한때 중원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상대방도 만만치 않아 난타전이 한동안 이어졌다.

 싸움이란 자원과 역량을 고려하여 때와 장소를 가릴 수 있어야 한다. 패착이 나왔다. 기다리고 지키면 되는 데 뻗어나간 것이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돌을 던졌지만 대국에서 적잖은 배움도 얻었다.

      

 이 여울온 지 어언 10년이 다 돼간다. 인생 3막이니 또는 인생의 황금기는 60~75세라는 이야기가 이제는 낯설지 않다.   

  

 마지막 3국은 이미 시작됐다. 이전 대국이 상대방의 소맷자락 따라가며 응수하기에 급급했다면, 이제는 본질적, 근원적인 문제와 겨루고 싶다. ‘진아(眞我)’에 대한 갈구다.     

 거대한 담론일 수도 있다. 만물 중에서 인간만이 자신의 삶과 정체성을 회의할 수 있으며, 본질에 다가갈 수 있는 천부적 능력을 받았다고 한다.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서른 후반에 입문한 기수련이 길라잡이가 되고 지구력이 뒷받침된다면 도전해 볼만하다. 에크하르트 톨레의 ‘The power of NOW’에 이런 문구가 떠오른다. “기(氣)는 현시되지 않은 세계와 물리적인 우주 사이의 연결고리다.”    

 날마다 깨어 있는 삶이란 존중받아 마땅하다. 설령 본질에 미치지 못했다 하더라도 만년에 이르기까지 깨어있었다는 것.

 이만한 꽃놀이 패가 또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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