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2)

- ‘유홍문 상금산’은 누구의 글씨인가

by 소운

쌍홍문을 벗어나니, 산 정상으로 향하는 두 갈래 길이 나타났다. 나는 오른쪽 길을 선택했다. 보리암까지만 오르면 비교적 쉽게 정상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번잡함을 피하려 월요일에 왔건만, 보리암 경내는 여전히 관광객들로 붐볐다. 기념품 판매점까지 계단으로 올라가 잠시 가쁜 숨을 가다듬었다. 판매점 왼쪽의 데크 계단을 따라 마지막 힘을 내어 올랐다.

정상에 오르니 너럭바위가 나를 반겼다. 신록의 계절 5월, 바닷바람이 물이 오른 새싹들의 싱그러움을 여기까지 불어 올리고 있었다. 나는 봉수대 직전까지 올라와 바위 위에 다리를 펴고 앉았다.

먼저 자리 잡은 큰 바위 세 개 중, 목혜(木鞋) 바위가 ‘어서 오게나’하고 내게 말을 건넸다. 마치 지리산 신선이 이곳에서 풍류를 즐기다가, 취해 벗어놓고 간 나막신 같았다. 한 짝은 밑창이 터졌고, 성한 한 짝이 문장암(文章巖)이었다. 오른쪽 바위는 무슨 이유인지 아까부터 돌아앉았다.

【사진 1 출처:素雲 Photo folder】


문장암 석벽의 새겨진 한자를 다시 해독해 보는 것도 즐거움 중 하나였다. 큰 글자 6자는 ‘유홍문 상금산(由虹門 上錦山)’인데, ‘쌍홍문으로 해서 금산에 올랐다’는 것이 일반적 해석이다. 혹자는 ‘쌍홍문으로 말미암아 금산이 으뜸이다’라고도 풀이하는데, 이는 쌍홍문의 가치를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예전부터 금산에 오르는 길이 여러 갈래 있었기에 ‘쌍홍문으로 해서 금산에 올랐다.’는 표현이 더 무난할 것이다.

조선시대 관직에 있던 사람 중 남해 유배를 온 이들이 모두 29명이었는데,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지저귄다..’로 알려진 남구만도 그중 한 분이었다. 1679년 8월, 아들 남학명이 부친 남구만을 모시고 금산에 올랐다는 기록이 『회은집 2권/ 기(유금산기)』에 남아있다.


【사진 2 출처:素雲 Photo folder】


“.. 새겨진 큰 글 여섯 자는 ‘홍문으로 해서 금산에 올랐다’고 말한다. 옆에 작은 글자는 ‘가정 무술년’이다. ‘전 학림학사 주세붕 경유, 상주포 권관 김구성 성지, 진사 오계응 한지, 승려 계행이 같이 산에 올랐다. 한지의 아들 현남이 글을 쓰고, 새긴 사람은 승려 옥공도〇’ 등으로 모두 49자다.

큰 획은 팔뚝과 같고, 작은 것 역시 안공의 <중흥송>과 같다. 바위 결이 거칠고 사나운 까닭에 이끼를 걷어내고서야 겨우 알아보고 읽을 수 있었다..”


(刻大書六字曰由虹門上錦山。旁稍細書曰嘉靖戊戌歲。前翰林學士周世鵬景游,尙州浦權管金九成成之,進士吳季鷹翰之,僧戒行同登。翰之子顯男書。刻僧玉工道‘一字缺’ 等四十九字。大畫如臂。細者亦如顔公中興頌。而石理麤頑。僅能掃苔認讀。)


각 이름 뒤 글자는 자(字)다. 가정 무술년은 서기 1538년(중종 33년)이다. 주세붕 선생은 소수서원의 전신인 백운동서원을 세우고, 인삼재배라는 역발상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구제한 분으로 알려져 있다.

주세붕 일행이 다녀간 지 141년 후, 남구만 부자가 금산에 왔고, 작은 획 일부는 알아보기 힘들고 한 글자는 아예 모르겠다고 했다. 그날 금산에 같이 오른 사람은 4명이었고, 이후, 승려 옥공도〇가 진사 아들의 글씨를 받아 석벽에 새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의문이 생겼다. 왜 진사가 아닌 아들이 쓴 글을 받아 승려가 바위에 새겼을까? 진사가 세상을 떴거나, 아니면 대단찮게 여겼던 것일까?


조선시대 명암 정식은 숙종, 영조 때 사람으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지리산 자락에 묻혀 후학 양성에 힘쓴 선비였다. 그의 문집 『명암집 5권/록(금산록』에서는 큰 글자 6자가 누구의 글씨인지 밝혔다.

“.. 산 정상에 큰 바위가 있다. ‘홍문으로 해서 금산에 올랐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고운 최치원의 글씨다.”

정식은 남학명보다 46년 뒤인 1725년 8월에 이곳에 왔다고 했다. 작은 글자는 말하지 않고 6자가 최치원의 글씨라고 단언한 근거가 뭘까? 지리산 곳곳에서 최고운의 석각을 많이 접했기 때문일까?

최고운에 대한 언급은 조선 후기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정식이 다녀간 지 약 25년 후에 출간된 책이다.

“.. 금산 동천은 최고운이 놀던 곳이며, 고운이 쓴 큰 글씨가 아직도 석벽에 남아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큰 글자 6자가 주세붕 선생의 글씨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어떤 사람이 써 놓았던 6자 옆에 주세붕 일행의 기록을 병기한 것이 더 합리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어떤 사람’이 곧 최고운인지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해 보였다.


또 다른 의문점은, 주세붕 선생이 방문한 시기가 1538년 몇 월일까 하는 점이다. 석벽에는 ‘가정 무술 세’라고만 적혀 있고 계절은 명시되어 있지 않다. 선생은 후사가 없어 주박을 양자로 들였고, 후일 주박은 선생의 시문집을 모아 『무릉잡고』를 출간했다.

『무릉잡고 부록 2권, 연보』를 살펴보면, 주세붕 선생은 외직을 청하여 1537년 4월에 곤양 군수로 제수되어다가, 이듬해 6월에 파직당했다.

모친상을 당한 것은 1738년 12월이다. 10월에 ‘집안에 어려움이 닥치다’ 제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모친의 병이 깊어 직접 병시중을 했다. 분향하면서 병이 났기를 하늘에 축원했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흰 실 8 타래를 주고 갔는데, 다음날부터 조금씩 차도가 있었다. 80일을 더 살다 돌아가셨다. 8 타래가 80을 의미한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수명을 80일 늘린다는 점괘였다. 선생은 울부짖으며 가슴을 쳤다..”


이를 종합해 보면, 곤양 군수로 재직 중이었던 1538년 상반기일 가능성도 있지만, 파직 후인 칠월에서 모친이 병중인 시월 사이가 더 합리적으로 보였다. 영험하다고 알려진 금산에 올라 노모의 건강을 기원하고자 했던 마음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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