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홍문 내부를 벗어나면 두 갈래 길이 나온다. 곧바로 가는 오른쪽 길을 택했다. 많이 쉬었으니 탄력을 받아 보리암까지만 오르면 그다지 힘들지 않게 정상까지 갈 수 있다.
조금 올라서 길 오른쪽으로 금산 13경 음성굴을 알리는 안내판이 보였다. 그런데 근접해 있는 14경 용굴 안내 문구가 빠진 것이 의아했다. 지금은 출입 통제돼 있으나 예전에는 둘 다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인파를 피해 월요일에 왔건만 보리암 경내는 여전히 관광객으로 붐볐다. 보리암 옆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복곡 주차장에서 오는 관광객들과 만나는 기념품 판매점과 마당이 나온다. 왼편으로 돌아 나무 테크 계단을 시작으로 막바지 힘을 냈다.
정상에 오르니 너럭바위가 찾아오는 객을 반긴다. 신록의 계절 5월. 바닷바람이 한창 물이 오른 새싹들의 싱그러움을 여기까지 쓸어 올리고 있다. 창공도 누가 빗자루 질을 했는지 조금 전까지 있던 비구름이 말끔히 걷혔다. 봉수대 빼고 더 이상 오를 길 없어 잠시 바위 위에 다리 펴고 앉았다.
먼저 자리 잡은 큰 바윗돌 세 개가 ‘어서 오게나’하고 말을 던진다. 목혜(木鞋) 바위다. 지리산 신선이 들러 음풍영월하다 취기에 벗어놓고 간 나막신 같다. 한 짝은 밑창이 터졌고 성한 한 짝이 문제의 문장암(文章巖)이다. 무명의 맨 오른쪽 바위는 볼품이 없었던지 스스로 돌아앉았다.
【사진1 출처:素雲 Photo folder】
문장암 석벽에 새긴 한자를 다시 해독해 보는 것도 즐거움 중 하나다. 큰 글자 6자는 ‘유홍문 상금산(由虹門 上錦山)’이다. ‘쌍홍문으로 해서 금산에 올랐다’는 것이 일반적 해석이다. 그런데 달리 풀이해 보는 사람도 있다. ‘쌍홍문으로 말미암아 금산이 으뜸이다’라고 보는 시각이다. 쌍홍문의 가치를 나름 평가한 것으로 본다. 예전부터 금산에 오르는 길이 몇 갈래 있었기 때문에 ‘쌍홍문으로 해서 금산에 올랐다.’는 것이 무난한 표현일 것 같다.
조선시대 관직에 있던 사람으로서 남해 유배를 온 분이 모두 29명이다『남해 백년사(장대우 편저)』.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지저귄다..’로 알려진 남구만도 있다. 1679년 8월 아들 남학명(1654~1722)이 부친 남구만을 배행(陪行)하여 금산에 올랐다. 그때의 기록을 『회은집』에 남겼다.
【사진2 출처:素雲 Photo folder】
“.. 새겨진 큰 글 여섯 자는 ‘홍문으로 해서 금산에 올랐다’고 말한다. 옆에 작은 글자는 ‘가정 무술년’이다. ‘전 학림학사 주세붕 경유, 상주포 권관 김구성 성지, 진사 오계응 한지, 승려 계행이 같이 산에 올랐다.’
‘한지의 아들 현남이 글을 쓰고, 새긴 사람은 승려 옥공도〇’ 등으로 모두 49자다. 큰 획은 팔뚝과 같고, 작은 것 역시 안공의 <중흥송>과 같다. 바위 결이 거칠고 사나운 까닭에 이끼를 걷어내고서야 겨우 알아보고 읽을 수 있었다..”
각 이름 뒤 글자는 자(字)다. 가정 무술년은 서기 1538년(중종 33년)이다. 주세붕 선생은 소수서원의 전신인 백운동서원을 세우고, 인삼재배라는 역발상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구제한 분으로 알려져 있다. 주세붕 일행이 다녀 간지 141년 후에 남구만 부자가 왔는데, 작은 획 일부는 알아보기 힘들고 한 글자는 아예 모르겠다고 한다(一字缺). 그날 금산에 같이 오른 사람은 4명이고, 이후 어느 날 승려 옥공도〇가 진사 아들의 글씨를 받아 석벽에 새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명암 정식(鄭栻, 1683~1746)은 숙종, 영조 때 사람으로 출사(出使) 하지 않고 지리산 자락에 묻혀 후학 양성에만 힘쓴 포의(布衣)다. 그의 문집 『명암집』에서는 큰 글자 6자가 누구의 글씨인지 말한다.
“.. 산 정상에 큰 바위가 있다. ‘홍문으로 해서 금산에 올랐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고운 최치원의 글씨다.”
(峯頭有大巖。刻曰虹門上錦山。乃孤雲筆也。)
정식은 남학명보다 46년 뒤인 1725년 8월에 이곳에 왔다. 작은 글자는 말하지 않고 6자가 최치원의 글씨라고 단언한 근거가 뭘까? 지리산 이곳저곳에서 최고운의 석각을 많이 보아왔던 탓일까?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도 나온다. 정식이 다녀간 지 대략 25년 뒤에 나온 책이다.
“.. 금산 동천은 최고운이 놀던 곳이며, 고운이 쓴 큰 글씨가 아직도 석벽에 남아 있다..”
(錦山洞天 卽 崔孤雲所遊處 孤雲所書大字 尙留石壁)
지금까지 열거한 여러 내용들을 놓고 볼 때, 큰 글자 6자를 주세붕 선생의 것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누군가가 써 놓았던 6자 옆에 주세붕 일행의 기록을 병기한 것으로 보인다. 최고운의 글씨 가능성도 열어두어야 하겠지만 조심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주세붕 선생이 다녀 간 시점이 1538년 몇 월쯤일까. 석벽에 ‘가정 무술 세’라고만 하고 계절을 남겨놓지 않았다. 선생은 후사가 없어 주박(周博)을 양자로 들였는데, 후일 선생의 시문집을 모아 『무릉잡고(武陵雜稿)』를 출간했다.
『무릉잡고 부록2권 (연보)』를 찾아보았다. 주세붕 선생은 외직을 청하여 1537년 4월에 곤양 군수로 제수된다. 이듬해 6월에 검시관으로 남형(濫刑)을 한 상관을 비호했다는 죄목으로 파직당한다.
모친상을 당한 것은 1538년 12월이다. 10월에 ‘집안에 어려움이 닥치다’ 제하의 내용을 살펴보니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모친의 병이 깊어 직접 병시중을 했다. 분향하면서 병이 났기를 하늘에 축원했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흰 실 8 타래를 주고 갔는데, 다음날부터 조금씩 차도가 있었다. 80일을 더 살다 돌아가셨다. 8 타래가 80을 의미한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수명을 80일 늘린다는 점괘였다. 선생은 울부짖으며 가슴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