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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운 May 18. 2021

금산(下)

- 조선시대 무신과 문신을 만나다

 정상부에 있는 문장암(文章岩) 외, 바로 옆에 있는 목혜암(木鞋岩)-밑창이 터진 나막신 바위-에는 거의 난수표 수준의 글자들을 볼 수 있다. 예전에 본 석각(石刻)을 다시 찾았다. 목혜암 바로 뒤에 있는 바위다. 사진 가운데서 왼쪽으로 여섯 줄을 써내려 가는데, 자세히 보기 위해 가까이서 또 하나 찍었다.   

 

節度使  南德夏

軍官   盧億, 趙願泰, 全佑邦

己未 菊秋

縣令   成胤績

【사진 1 출처:素雲 Photo folder】


【사진 2 출처:素雲 Photo folder】


 절도사 남덕하(1688~1742)는 조선 숙종, 영조 때 무신이다. 의암 부근에 논개의 애국 충정을 기리는 <의기사(義妓祠)> 사당을 세우게 한 인물이다. 또한 의암 맞은편 <의암 사적비>는 명암 정식의 글인데, 걸려있는 현판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은 남덕하의 필체다.

 호위한 장교는 노억, 조원태, 전좌방 3인이고 현령 성윤적이 봉행했는데, 이때가 1739년(영조15) 국화 피는 가을, 9월이다. 남덕하의 나이 52살이니 요즘 사람으로 치면 적어도 60대 후반이다. 문장암보다 201년 뒤에 새겼다. 비교적 상태가 양호하고, 필체는 시퍼렇게 날이 선 칼로 찢어내듯 비장감이 감돈다.

   

 관심을 끄는 것은 행했던 현령이다. 현령 성윤적은 『남해 읍지(2008년)』를 찾아보면 재임기간이 10개월(1739. 9.17~1740. 7.29)에 불과하다. 부임하자마자(9월) 절도사 일행을 맞았다.

 뭍에서 관료들이 수시로 찾아오면 지방 관리로서 받는 스트레스는 상당할 것이다. 달리 생각해본다면 상전의 눈에 들어서 영전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눈도장?) 아닐까. 도서벽지를 벗어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혜택으로 여겼을 것이다. 임란 이후부터 순조까지 236년간 148명의 현령이 다녀갔다. 재임기간은 평균 1년 7개월이고 1년 미만도 전체의 30%가량임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남해 100년사(장대우 편저)』    

     

 좀 더 내려가다 보면 길 오른편에 안내판이 나타난다. 금산에서 자생한 줄사철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2019년 11월 식생조사 과정에서 뒤늦게 세상에 알려졌다.

 천연기념물 제380호로 지정된 진주 마이산 군락지의 개체보다 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줄기에는 공기 뿌리가 나 있고 물체에 붙어서 자라는 특이한 품종이다. 안내문과 나무만 번갈아 보고 지나치는 분들이 있다면 소매를 붙잡고 싶다. 나무가 붙어 있는 바위 왼쪽면의 글자들을 살펴보기 권한다.



【사진 3 출처:素雲 Photo folder】


【사진 4 출처:素雲 Photo folder】


方伯   權爀

幕下   白尙華, 尹宗衡

縣令   金佐國

察訪   金九澤

乙丑 初冬    


 방백, 도백 또는 감사 등으로 불리는 관찰사 권혁(1694~1759)의 이름이 나온다. 조선 영조 때 문신으로 뒷날 이조판서에 오른다. 안동 권 씨 권문세족으로 부친도 이판, 조부도 사헌부의 장령(掌令)을 각각 역임했다.

 수행원 백상화, 윤종형을 대동하고 현령 김좌국, 찰방 김구택이 봉행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따르면 당시 남해에는 금산, 설흘산 그리고 원산에 봉대가 있었다.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미루어 보건대 산 정상에 있는 봉대 실태조사를 위해 경상도 관할지역인 남해에 순행(巡行) 한 것으로 짐작된다.

 1745년 겨울 초입이라고 하니 52세다. 절도사 남덕하보다 6년 뒤에 왔지만 금산에서의 나이는 동갑내기다. 특이한 점은 남 절도사 때는 등정(登頂) 년도 뒤에 현령 이름이 있지만, 관찰사 때는 현령과 찰방 뒤에 연도가 나온다. 공식 수행원에 포함된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모른다. 봉행한 현령 김좌국은 청주 분인데 재임기간은 2년이다(1744. 9.27~1746. 9. 6)『남해 읍지(2008년)』. 재임 기간이 긴 편에 속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줄사철나무 수령은 대개 200년 안팎이라 한다. 경상도 관찰사 일행이 금산에 온 시기는 276년 전이다. 관찰사 기록을 새긴 각자(刻字)하고 줄사철나무 중 어느 쪽이 이 자리를 선점했을까 호기심이 생긴다.  

 나무가 먼저 뿌리를 내렸다고 가정해 보았다. 석공(石工)의 눈으로 봤을 때, 왼쪽에 여백이 남아 있는데 굳이 비좁은 공간까지 고집할 필요가 없다. ‘방백 권혁’을 새겨 넣는 공정이 웬만큼 까다롭겠는가. 평균 수령이나 순행한 시기 등을 두루 감안한다면 줄사철나무가 뒤늦게 자리 잡은 듯하다.


 관찰사 함자인 만큼 아슬아슬하지만 선을 넘지 않고 나무는 법도를 지켰다. 그럼에도 양자 간에 도도한 기품이 서려있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인간의 탐욕이라는 정(釘)에 의해 새겨진 26자 상흔,  오갈 데 없는 나무를 피붙이처럼 끌어안은 채 견디어  270여 년. 수더분한 바위는 이들을 보듬고 풍우상설(風雨霜雪) 맞으며 천년으로 나아가고 있다.   

 

 숱한 사람들이 길 따라 표표히 떠났지만, 땀과 숨결 일부는 석벽 속에 갇혀있다. 캐내서 옛사람들의 시대정신에 공감해 보고, 더 밝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헌신했던 선인들의 생애를 되짚어본다는 것. 온고지신의 온전한 실현이 아니겠는가. 금산에 올 때마다 새로운 이유다.  

    

 금산 입구에서 쌍홍문, 관찰사, 절도사 석각들 그리고 산 정상 문장암까지 수직으로 답사했다. 다음에는 상사바위, 금산 산장 그리고 보리암의 나비 이야기로 수평 답사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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