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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운 May 27. 2021

금산(左)

-  상사바위에 내리는 별

“이 아무개야!”

“아니, 돌아보는 너 말고 그 앞에.”

“그래, 그래 너!”

 그날따라 호랑이 같은 선생이 사근사근 웃으며 이 아무개를 불렀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그 학생은 반신반의하며 선생에게 다가갔다. 학생의 멱살을 낚아챈 것은 일순간이었다. 뺨을 두어 차례 얻어맞고 휘청거리는 학생. 잔뜩 화가 난 선생은 냅다 고함을 질렀다.

“저기 가서 두 손 들고 꿇어앉아!”    


 상사바위 위에 반 학생들을 데리고 온 선생은 바위 한가운데로 불러 모으고 있었다. 그 사이 맹랑한 아이 두세 명이 낭떠러지 가까이 기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맨 앞에 나서던 아이가 수백 미터 밑을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야~ 보인다, 보여!”  

 추락사고 일촉즉발이었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챈 선생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꼿꼿하게 서서 상냥한 목소리와 손짓으로 그 아이를 불러 들었다.     


 금산 상사바위 이야기를 꺼내면 아버님은 늘 그 친구분을 회상하셨다. 그만큼 상사바위는 어린 학생들에게 위험천만한 장소였다. 바위 끝이 모서리가 아닌 완만한 곡선 구간이라서 미끄러지면 손쓸 방도가 없다.

        

【사진 1 출처:素雲 Photo folder】


 언젠가 쇠말뚝 펜스를 흉물스럽게 두른 것을 보고는 잘 가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글감도 찾고, 흐릿한 기억도 바로잡기 위해 답사의 필요성을 느꼈다. 먼발치에서 상사바위를 바라보다가 직접 찾아 나섰다.    

    

 다행히 관광객이 한두 사람밖에 없어 한적했다. 상사바위 정상 부위가 나무 데크로 깔끔하게 조성돼 있어 꽤 놀라웠다. 나무 위를 뚜벅뚜벅 걸었다. 목판의 경쾌한 울림이 다리를 타고 오른다.

 산해 절승(山海 絶勝)이 툭 트인 시야에 펼쳐지는 데, 그 쾌감은 이루 비길 데가 없다. 깊은 숨을 서너 차례 들이켜고 나서 사색하듯이 데크 위를 걸어보았다. 어느새 하늘 산책하고 있었다.

    

 선경(仙境)에서 내려다보는 사바세계도 진초록 단장으로 아주 고혹적이다. 아스라이 사라지는 바다, 묵은 숨을 하얗게 토해내고서야 창공으로 거침없이 부활한다. 어찌 이 지경에 시(詩) 한 수 떠오르지 않겠는가.

【사진 2 출처:素雲 Photo folder】

 

저 멀리 남쪽의 명승지, 소금강이라 하는데.

(天南勝地小金剛)

구정봉과 쌍홍문은 그윽하고 멀어 가물거리는구나.

(九井虹門遠渺茫)

일찍이 남해는 신선들의 소굴이었으니,

(曾是海陽仙子窟)

광활한 창공에 채색 구름 멀리 뻗쳤구나.

(碧空寥廓彩雲長)    


 이 시는 이의현(李宜顯 1669~1745)의 문집『도곡집』에 수록된 칠언절구다. 영조 때 영의정까지 오른 조선 후기 문신이다.  

  

 상사바위라고 언제부터 불러졌는지 궁금해 안내판을 찾았다. 설명에 의하면, 조선 선조 때 봉강 조겸의 기록(1569년)에 따라 사신암(捨身巖) 또는 상사암(相思巖)등으로 명명되었다 한다. 그러나 기록에 대한 출전을 밝히지 않아 문헌을 찾아볼 수 없었다.     

 확보한 문헌 중에 조선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허목(許穆)의 『범해록(泛海錄)』이 있다. 인조 때 의령의 모의촌(慕義村)에 살았는데, 1638년 9월에 금산을 등정했다.    

  “.. 남쪽에 있는 바위 봉우리가 가장 기이한데 사신암 또는 구정봉이라고 했다. 위에는 아홉 개의 우물이 있고 짐승이나 새의 발자국조차 없었다.(南石峯最奇。曰捨身巖。或曰九井峯。上有九井。無獸蹄鳥跡。)”  

  

 그 외 문헌들-『회은집』, 『명암집』, 『능호집』, 『묵헌집』, 『석당유고』-에서는 한결같이 구정봉(九井峰)으로 단독 표기된다. 사신(捨身)은 원래 불교 용어다. 게다가 말맛이 좋지 않음에 유학자들이 기휘(忌諱)하다가, 조선 후기로 오면서 구정봉으로 굳어진 것이 아닐까. 여기에 남녀 간의 애틋한 서사를 입히고 윤색하여 오늘날 상사바위로 불려지는 것 같다.  


 보리암 삼층 석탑에서 상주 해수욕장 쪽으로 봤을 때, 오른쪽에 위치한 것이 상사바위다. 마치 우백호처럼 버티고 있어 북서풍 찬바람을 막아주는 형세다. 바람이 잦으니 자연히 바위가 닳고 흙이 흔치 않다. 오죽했으면 허목의 『범해록』에서 짐승, 새들의 발자취마저 없다고 했겠는가.

 유학자들이 남긴 문집에서 쌍홍문과 구정봉은 꼭 빠뜨리지 않는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두 개의 문집을 통해서 당시에 구정봉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살펴보았다.    

 

 『회은집』은 조선 숙종 때 문신 남구만의 아들 남학명(1654~1722)이 쓴 문집이다. 그는 1679년 8월에 등정했는데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구정봉에 올라보니 아래가 만 길이다. 푸른 바다와 마주 보고 있는데 불안하고 두려워서 몸을 더 숙일 수 없다. 돌 구덩이가 마치 가마솥과 같은 데 모두 아홉 개나 있었다. 각기 물을 담고 있어, 이 또한 유별나고 이상하다. (..登九井峰。峰下萬仞。直臨滄海。危�不可俯。有石窪如釜鼎者凡九。各自貯水。亦可謂奇怪..)”  

  

 『명암집』은 조선 숙종, 영조 때 사람으로 포의로 산 정식(1683~1746)의 문집이다. 1725년 8월에 등정한 것으로 나온다.

“.. 구정봉은 십만 척이나 되는 바위 덩어리다. 바다를 바라보고 서있다. 나무 계단으로 오르면 곧바로 백여 명이 앉을 수 있는 넓적하고 평평한 곳이 나온다. 과연 아홉 개의 우물이 있었다. 바위는 갈아놓은 것 같고 눈처럼 하얗다. 소나무 대여섯 그루가 드문드문 보인다. 뿌리는 돌 틈에 의지한 채, 밝고 의젓하게 늙어보려 한다.. (..九井峰則萬丈嵓嵒之石。臨海矣立。有木梯躋登。則平廣可坐百餘人。果有九井。其巖如磨。其色如雪。有疎松五六株。根托石罅。昂莊欲老..) ”    

  

 무엇보다 구정봉의 엄청난 스케일에 경외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바다 한가운데 있는 섬에 이처럼 험준한 바위가 있을 줄이야. 십만 척 절애(絶崖) 위에서 조망되는 푸른 바다에도 찬탄 일색이다. 아홉 구덩이에 대해선 신기한 듯이 이리저리 살펴보는 눈초리가 선연하다.  

     

 웅덩이를 세다 보면 아홉 개로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작은 것까지 합하면 더 된다. 예로부터 ‘아홉(九)’이라는 수는 완결수(完結數)라 불렀다. 제다 할 때 구증구포(九蒸九曝)를 비롯하여, 구만리(九萬里), 구곡간장(九曲肝腸), 구천(九泉) 등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많이 접하는 수다.

【사진 3 출처:素雲 Photo folder】


 크기와 모양도 제 각각이고 어떤 것은 인위적으로 형성된 것처럼 보인다. 낭떠러지에 돌출된 어느 바위 덩어리에 큰 것이 4개, 끄트머리에 작은 구멍 3개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무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더니  소맷자락 붙들고 밤낮을 거슬러 간다.


 맑은 그믐날.

 각 구덩이마다 고인 물을 퍼내고 정화수로 채워 기다리고 있다. 밤이 깊어갈수록 물 위에 하나 둘 별들이 영롱하게 내려앉는다. 가져온 공물을 차려놓고 경건하게 천제(天祭)를 올리는 무리들.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과 저 아래 고을의 부족장 그리고 원로들이 한 자리에 다 모였다.

 초헌에 아뢴다. 내년에는 비도 적당히 내리고 산 짐승들도 많아 기근이 없기를.. 아헌에는 어린애들이 수없이 죽었는데 빨리 역병이 물러서기를.. 종헌에는 고을 대소사가 무탈하게 술술 풀리기를 머리 조아려 아뢴다.


 떠들썩한 뒤풀이까지 모두 끝난 인시(寅時)쯤, 서원을 챙긴 별들도 하나 둘 하늘로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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