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바위 뒤로 내려와 오솔길을 걷다 보면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왼쪽은 헬기장으로 올라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좌선대 방향이다. 오늘 산행은 좌선대 부근, 금산 산장으로 이어지기에 오른쪽이다.
좌선대는 길을 가다가 오른편에 위치하는데, 다다르기 십여 미터 전 오른쪽으로 난 소로(小路)를 찾아야 한다. 그래서 좌선대를 왼쪽으로 끼고돌아 원래 길과 만날 것이다. 물론 똑바로 가도 내려가는 철 계단이 나오며 오른쪽으로 좌선대를 올려다볼 수 있다. 소로를 고집하는 이유는 옛사람들이 다니던 정다운 길이기 때문이다. 운치가 물씬거리고 눈요기 거리가 많다.
소로로 접어들면 곧바로 기암(奇巖)이 나타난다. 어디서 본 듯하다. 보리암 뒤편에 장군봉이 버티고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것이 바로 형리암이다. 그 바위를 따라 하다 그만 좌선대 옆구리에 머리를 들이박고만 형국이다. 유심히 보고 있노라면 웃음이 절로 새어 나온다. 왼쪽에 있는 바위가 좌선대(연화대)이고 오른편으로 삼사기단이 자리한다. 그러나 기단은 남쪽으로 보고 있어서 뒷부분 일부만 보인다.
【사진 1 출처:素雲 Photo folder】
조선 후기 유학자 남학명과 정식도 각자 문집을 통해 찬탄을 남겼다. 1638년 9월에 온 남학명은 이 기암을 자세히 묘사한 후에 ‘.. 저절로 만들어진 돌문 같다.’고 했고, 그 보다 46년 뒤 8월에 온 정식은 ‘.. 흡사 사람이 만든 것 같은데, 절묘하기 이를 데 없다.’고 했다.
또한 정식은 문집에서 ‘이 산에는 보리암, 의상각, 도솔암 세 곳이 있다.’고 했다. 현 위치에서 왼쪽 지역, 즉 좌선대의 석벽을 등지고 남향으로 과거에 도솔암이 있었다. 지금도 무성한 잡초를 헤쳐 보면 일부 석축이지만 어렵잖게 발견할 수 있다. 두 선비가 도솔암 흔적을 문집으로 남겼는데 순서대로 살펴본다.
“.. 작은 두 기둥이 서 있는데, 마치 작은 문을 만들어 놓은 것 같다. 안으로 들어가니 암자가 나온다. 나무 울타리로 벽을 두르고 남쪽에 외짝 문 하나만 남겨두고 있다. 어찌 그 안이 따뜻하다고 할 수 있으랴. 지금 위로는 비가 내리고 곁으로는 바람이 분다. 썩고 무너져 거주할 수 없다(有二小柱如夾門之制。門內有菴。舍皆以木柵築壁。只留南面一牕。蓋取其完固溫暖也。今上雨旁風。朽壞不可居)”-남학명
“.. 도솔암이 있는데 부벽만 남겨두고 있다(.. 有兜卛菴。扶壁而去).”-정식
좌선대와 삼사기단 사이에 있는 기암을 통과해 조금 가다 보면 금산 산장의 야외 테이블이 나타난다. 요즘 핫 플레이스로 떠오르는 곳임을 반증하듯 젊은이 두세 팀이 앉아있다. 하나같이 컵라면을 먹으며 추억 쌓기에 정신이 팔렸다.
【사진 2 출처:素雲 Photo folder】
빈자리에 앉자마자 스펙터클한 풍광이 가슴속으로 밀치고 들어온다. 한동안 눈을 뗄 수 없다. 비지땀을 흘러가며 오직 상주 쪽에서 올라와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쌍홍문에 도착하면 곧장 왼쪽 길을 택하여 이 자리로 오는 것이 관례였다.
산장의 할머니가 직접 담근 막걸리에 도토리묵 안주 거리가 곁들인 상차림, 잊을 리 있겠는가! 간혹 해무(海霧)가 발아래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 사이다 기포처럼 온몸을 식히며 지척도 분간 못하게 만든다. 선인(仙人)이 따로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296년 전, 이 부근에서 일필휘지로 시심(詩心)을 써 내려간 포의(布衣)가 있었으니 명암 정식이다.
‘대개 산꼭대기들은 그 형세가 허공에 매달려 있는 것 같고, 앞으로는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네. 훤하게 넓게 트여 그 끝이 보이지 않고, 바다와 하늘색이 구분 없느니. 바람에 펄펄 날리 듯 창공을 하찮게 여기고, 바람을 자유자재로 거느리려고 하네. 가히 천하에 제일 뛰어난 자리라 이를 만하지(盖山之上頂。勢若懸空。前臨滄海。廓然無際。水天一色。飄飄乎有凌虛御風之意。可謂天下第一勝處)’
정식은 이 글을 쓰기 전, 주변의 명승을 두루 살폈다. 왼쪽으로부터 귀석(龜石:흔들바위), 범봉(帆峯: 촉대봉), 향로봉, 도솔암의 순으로 각각의 특징과 위치를 세세히 묘사해 놓았다. 이 부근, 그러니까 금산 산장의 테이블이 놓여있는 자리라고 추정하는 이유이다.
또한 남학명은 상사바위 구경을 마치고 『회은집』에 의미 있는 글을 남겼다. ‘도솔암 석문으로 해서 신당을 지나 돌아왔다(還從兜率石門歷神堂).’ 기암을 지나자 인근에 신당이 있다고 했다. 몇몇 문집에서도 ‘성조신사’니 ‘산신당’이니 언급하고 있어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고 본다.
우측 가까이에 보이는 높다란 바위더미가 좌선대다. 힘들게 다 오르면 한 사람이 앉고도 남을 만큼 파인 자리가 나오는데, 아래를 내려다보면 스릴 만점이다. 금방이라도 앉은 바위가 굴러 떨어질 형세라 간이 콩알만 해진다. 그럼에도 가부좌 틀고 합장한 젊은 시간의 편린들..
언젠가 의자에 앉아 있는데 좌선대에 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주위 사람들의 부추김에 여성 분이 가까스로 자리에 앉았다. 오호! 강단 있는 분이라 생각할 수밖에. 갑자기 돌고래 샤우팅이 터져 돌아보니 그분이 일어서서 쩔쩔매고 있는 게 아닌가. 허리를 구부린 채 뒤로 돌아서서 올라온 곳으로 내려와야 한다. 좌선대 사용설명서미 숙지로 인한 해프닝이었다.
【사진 3 출처:素雲 Photo folder】
세 채 중에서 맨 앞에 있는 석조 이층 건물은 지은 지 50년이 더 넘는다. 아래층에서 세 반의 남학생들이 따닥따닥 붙어 하룻밤을 잤다. 친구들의 발 냄새 맡아가며 금산과의 첫 인연이 시작된 곳이다.
다음날 새벽 가까스로 일어나 상사바위에서 일출을 보고, 토끼처럼 오솔길을 뛰어 되돌아오던 초등학교 오 학년 시절. 그날의 친구들은 인연 따라 뿔뿔이 흩어지고 덩그러니 남은 빈자리만 바라다보니 가슴이 헛헛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