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6)

보리암에 나는 나비

by 소운

마지막 행선지 보리암이다. 금산에 남겨진 각자(刻字)들은 세 지역에 밀집해 있다. 산 정상, 보리암 경내, 그리고 삼층 석탑 주변이다. 산 정상 지역은 외지에서 온 고관대작과 수행원, 영접한 남해 현령 등의 이름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름을 석벽에 새기려는 집착의 근원은 무엇일까? 남해 현령의 출신지를 살펴보니, 경성이 제일 많고 평양도 세 분이었다. 지방 벼슬인 종 5품으로 중앙의 관료들을 영접하거나 봉행하는 일은 각별했을 것이다. 자신의 출신지 인맥을 활용하려 했을 것이고, 상전의 눈에 들기 위한 노력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이와 같은 시대적 맥락에서, ‘인증 샷’을 남기려는 유혹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정상 부근은 시대적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목적이라면, 보리암 경내와 석탑 주변부는 그보다 원초적이고 미래적인 의미를 지닌다. 특히 석탑 주변은 각자들이 난무할 정도로 집중되어 있다.


【사진 1 출처:素雲 Photo folder】


조선은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았고, 숭유억불 정책이 이를 뒷받침했다. 양대 전란을 거친 후, 민생의 안정과 지방 부호들의 부의 축적이 이루어졌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중건된 사찰이 많다는 점에서, 유교적 가치와 불교적 관념이 어느 정도 공존했음을 알 수 있다.


유교는 내세관이 없는 실천윤리다. 죽음을 한계로 인식한 유학자들에게 불교의 영생 사상은 끊임없는 압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암자나 탑마다 이름을 새긴 것 역시 이런 결과물로 이해할 수 있다.


금산은 조선 전기까지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중종 때 주세붕 선생이 방문했고, 이후 유학자들이 다녀가면서 금산의 명성도 퍼져 나갔다. 이때부터 각자가 성행되고 지방 부호들도 가세한 것으로 보인다.


보리암과 석탑 주변, 심지어 정상까지도 암각화는 단 한 곳, 보리암 경내에만 존재한다. 이천 년대 초, 한 포털에 올라온 기사는 스님의 글이었다. 그는 ‘금산 보리암에 기가 집중된 곳은 나비 암각화다.’라고 주장했다. 기가 모이는 곳, 나비 암각화라는 점에서 나는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어느 여름휴가철, 답사를 했는데 어렵잖게 나비를 발견했다. 강렬한 인상에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왜 그전에는 몰랐을까! 표현의 디테일에 놀라고 훼손된 부분에 탄식했다. 만감이 스쳤다. 다만, ‘기가 모이는 곳’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사진 2 출처:素雲 Photo folder】


시간이 지나고, 이번 답사에서는 이끼를 털어내며 구석구석을 살펴봤다. 처음에는 불화일 가능성도 의심했지만, 이내 접었다. 나비가 좌우로 협시한 형태를 보니, 민화 중 무속과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산신각으로 오르는 석벽이 이와 연관 있을지도 모른다.


상단에 ‘사(師)’와 ‘좌(佐)’라는 글자를 어렵게 찾아냈을 뿐, 나머지 부분은 무엇을 새겼는지 알 수 없었다. 인위적으로 훼손된 부분을 고려해 최대한 남겨진 부분을 찾아보았다. 중앙에 는 부부처럼 보이는 두 사람, 오른편에는 한 남성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들이 꼭 이런 방식으로 이름을 남겨야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씁쓸했다.


중앙 하단의 세 개로 된 큰 문양은 꽃분(盆)의 굽 같았다. 좌우를 에워싼 꽃과 가지들은 매화로 연상되지만, 꽃잎이 네 개인 것도 있어 혼란스러웠다. 나비는 호랑나비(범나비)로 의심되지 않았다.


꽃분에 올린 것이 무엇인지 불분명하지만, 신령이 강림할 수 있는 공물일 가능성도 있다. 귀신이 먹는 제물이라는 것이다. 충청도를 비롯한 중부지방에서는 ‘불 밝이 쌀’이라 하여 굿, 동제, 고사 때 제물로 사용했는데, 쌀 위에 기름 종지를 놓아 불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남해에서 그런 근거는 찾을 수 없었다.


향로 대신 매화를 양옆으로 둘러 강신을 축원했는데, 나비가 먼저 알고 찾아왔을 것이다. 호랑나비는 부귀와 장수를 상징한다고 했다. 오주석 선생은 민화의 나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비는 나비 접(蝶) 자가 80 노인 질(耋) 자하고 ‘띠에’하는 발음이 같아요. 그래서 80 노인이 됩니다.”


그렇다면 금산 신령에게 부모님의 팔순까지의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겼을지도 모른다. 이 정도의 암각화를 새길 정도이면 그 시대의 사대부나 부호일 가능성이 크다. 그림 위의 ‘사’와 ‘좌’는 신령님에게 보살핌을 청하는 뜻처럼 보였다.

【사진 3 출처:素雲 Photo folder】


왼쪽은 나비 한 마리만 찍은 사진이고, 오른쪽은 훼손된 부분을 제외한 전체를 스케치한 것이다.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오른쪽 나비였다. 미학적으로 완성도 높은 작품이었다. 나비의 입과 눈, 배의 주름, 다리, 날개 끝의 음영 처리 등 세심한 석공의 솜씨가 돋보였다. 특히, 눈매를 보면 매화향에 심취한 듯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비 암각화가 기가 센 곳이라는 스님의 말은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일까? 나비가 기의 흐름을 좇는다고 생각했을까? 사실 나비는 햇빛과 태양의 고도를 이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결국 나비는 매화 향을 쫓아왔을 뿐이다.


허목은 이조판서를 거쳐 영의정까지 오른 조선 후기 문신이었다. 1638년(인조 16년) 9월에 금산을 둘러본 후 『범해록』에 이렇게 기록했다.


‘보리암 아래 바위 봉우리 일대에 산의 기가 쌓인 곳이라 한다.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태조가 등극하기 전에 무학대사를 따라와 산신령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금산에서 기가 센 곳은 탑대나 만장대일 것이다.


암각화를 뒤로하고, 또 다른 나비가 기억 속에서 날아올랐다.

“장주가 나비 된 꿈을 꾸었다가 다시 장주가 나비로 변하니, 어떤 것이 진짜인지 구분 못하였다 하는데, 너 또한 그러하냐?”, 육관 대사가 성진에게 설법하고 있다. 금산에서 멀지 않은 곳, 구운몽의 저자 서포 김만중 선생 유배지인 노도를 다음에 답사하고 싶다.




【참고 문헌】

〇『한국민속 대백과사전』

〇許穆, 『記言別集』卷之十五/記行/泛海錄

〇南鶴鳴, 『晦隱集』第二/記/遊錦山記

〇鄭栻, 『明庵集』第五卷/錄/錦山錄

〇李麟祥, 『凌壺集』卷之三/記/錦山記

〇李萬運, 『默軒集』卷之七/記/遊錦山記

〇金相定, 『石堂遺稿』卷之二/文/錦山觀海記

〇周博, 『武陵雜稿』附錄卷之二/年譜

〇이중환(이익성 옮김), 『택리지』, (주)을유문화사, 2013

〇김만중(구인환 역음), 『구운봉』, (주)신원문화사, 2004

〇장대우(편저자), 『되돌아본 南海100年史』, 남해문화진흥회, 1999

〇남해읍지편찬위원회, 『남해읍지』, 2008

〇오주석,『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 도서출판 푸른 역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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