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행선지 보리암이다. 금산에 남겨진 수많은 각자(刻字)들은 세 지역에 밀집돼 있다. 정상(頂上)과 보리암 경내(境內) 그리고 삼층석탑 주변이다. 정상 지역은 외지에서 온 고관대작과 수행원, 봉행한 남해현령, 기타 인물들의 이름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름 자(字)를 석벽에 남기려는 집착의 근원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남해 현령의 출신지를 찾아봤다. 경성이 제일 많고 평양도 세 분이다. 종 5품 지방 벼슬로서 중앙의 관료들을 영접하거나 봉행하는 행사, 각별할 것이다. 출신지의 인맥도 살펴보려 할 것이고, 상전의 눈에 들려고 온갖 역량을 쏟지 않겠는가. 그러니 다녀간 후 시쳇말로 ‘인증 샷’을 남기려는 유혹이나 주위의 부추김이 있을 법도 하다.
정상 부근은 이처럼 시대적 존재감과 현재를 과시하려 했다면, 보리암과 석탑 주변부는 원초적인 발원과 미래라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특히 석탑 주변부는 현기증이 날 만큼 각자가 난무한다.
【사진 1 출처:素雲 Photo folder】
조선은 성리학이 국가 경영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고, 숭유억불은 이러한 기조를 확립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이었다. 양대 전란을 거친 이후는 민생의 안정과 지방 부호들의 부의 축적이 일어나던 시기다. 사찰의 절반 이상은 이 시기에 중건된 사실을 미루어볼 때, 유교적 가치와 불교적 관념의 교집합이 어느 정도 공존했음을 알 수 있다.
유교는 내세관이 없는 실천윤리다. 죽음이라는 절대 한계를 가진 존재로서 불교의 영생은 삶에서 끊임없는 압박이었고, 암자나 탑마다 이름을 남긴 것도 이러한 결과물로 받아들인다.
금산이라는 명승지도 조선 전기까지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중종 때 주세붕 선생이, 이후 여러 유학자들이 내왕하면서 각자가 성행되고 지방 부호들도 가세한 것으로 보인다.
보리암과 석탑 주변부 심지어 정상을 총망라하여 암각화(巖刻畵)는 단 한 곳, 유일하게 보리암 경내에 존재한다.
이천 년대 초반 무렵, 한 포털에 올라온 기사가 있었다. 스님이 쓴 글인데, ‘금산 보리암에서 기(氣)가 집중되는 곳은 나비 암각화다.’라고 했다. 기가 모이는 곳 그리고 나비 암각화라는 점에서 호기심이 발동했다.
기라고 하면 회사원 시절인 ‘93년 모 수련단체에 입문하여 지금까지 연을 놓지 않고 있다. 보리암에 수없이 가보았지만 나비 암각화라니 처음에는 생뚱맞은 이야기 같았다. 벼르던 답사는 이듬해 여름휴가철에 이루어졌는데 어렵잖게 나비를 발견했다.
【사진 2 출처:素雲 Photo folder】
처음 마주 대했을 때, 강렬한 임팩트는 한동안 멍하니 서있게 만들었다. 왜 그전에는 몰랐을까! 표현의 디테일에 놀라고 훼손된 부분에 탄식했다. 만감이 스쳤다. 다만, ‘기가 모이는 곳’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잊을 만하면 찾아가곤 했다. 이번 답사에서는 이끼를 털어내면서 가려진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무엇보다 먼저 궁금했던 것은 암각화의 성격이었다. 처음에는 불화(佛畵) 일 가능성도 의심해 봤지만 이내 접었다. 나비가 좌우로 협시(挾侍)하는 것으로 봐서 민화 중 무속과 관련성이 더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산신각으로 오르는 석벽이라는 점도 생각해 봤다.
인위적인 훼손이 심한 부위가 중앙과 우측 일부분이다. 상단에 ‘사(師)’와 ‘좌(佐)’도 힘들게 찾아냈을 뿐 그 외는 무엇을 새겼는지 전혀 알 수 없다. 남겨진 부분을 최대한 활용해 보아야만 했다. 중앙의 하단, 세 개로 된 큰 문양은 꽃분(盆)의 굽이다. 중앙의 좌우를 크게 에워싸고 있는 꽃과 가지들은 매화로 보인다. 잎사귀가 없이 꽃 형태가 그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다만, 꽃잎이 네 개인 것도 있어 혼란스럽다. 좌우의 나비는 호랑나비(범나비)로 의심하지 않는다.
꽃분에 올린 것이 뭔지 모르지만 신령이 강림해서 흠향(歆饗)할 수 있는 공물(供物) 임에 분명하다. 신령이 먹을 수 있는 제물이라는 것이다. 충청도를 비롯한 중부지방에서는 ‘불밝이쌀’이라 해서 굿, 동제, 고사 때 가장 기본이 되는 제물이 있다. 신령이 강림할 수 있게 쌀 위에 기름 종지를 놓아 불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남부지방인 남해에서도 그렇게 했다는 근거는 발견할 수 없었다. 공물의 종류에 대해서는 영원한 미제로 남겨둬야 할 것 같다.
향로 대신에 향이 천리로 간다는 매화를 양 옆으로 둘러 강신(降神)을 축원하는데, 나비가 먼저 알고 찾아왔다. 예로부터 호랑나비는 부귀와 장수를 상징하였다.
특히 오주석(吳柱錫) 선생은 민화의 나비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나비는 나비 접(蝶) 자가 80 노인 질(耋) 자하고 ‘띠에’하는 발음이 같아요. 그래서 80 노인이 됩니다.” 그렇다면 부모가 팔순이 되도록 장수하시는데, 잔병치레 없이 청춘인 양 곱게 늙으시기를 금산 신령에게 축원한 것이 아닐까. 이 정도의 암각화를 부탁할 정도면 그 시기에 살만한 사대부나 부호일 것이다. 축원이 더욱 간곡한 것은 그림 위에 ‘사’와 ‘좌’를 사족처럼 추가하여 ‘신령님이 부디 보살펴 달라.’고 했다.
【사진 3 출처:素雲 Photo folder】
왼쪽은 나비 한 마리만 찍은 사진이고, 오른쪽은 훼손된 부분을 빼고 전체를 스케치한 것이다.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양쪽 나비 중에 오른쪽 나비다. 종교적 편견 없이 오직 미학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끝에 가서 말리는 입(빨대)은 그렇다 치고, 눈매를 보면 매화 향에 심취한 듯 미소를 띠고 있다. 나비의 눈은 겹눈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감성을 나비의 눈에 투사했다. 배의 주름살과 길게 뻗은 다리가 선명하고, 날개 끝의 무늬는 작은 구멍들을 파서 음영(陰影) 처리했다.
물론 화공(畵工)의 밑그림도 걸작이지만, 정(釘)으로 예리하게 쪼아내는 석공(石工)의 손놀림에 더욱 감탄할 수밖에 없다. 두 글자의 박락(剝落)을 미루어 수백 년이 지난 작품 같다. 사다리를 밟고 선 석공의 땀방울과 숨결, 바위 결을 옆 눈으로 살피는 모습까지 선연하게 떠오른다.
마지막으로 ‘나비가 모인다는 것은 기가 집중되기 때문이다.’라고 한 스님의 이야기가 무엇에 근거를 둔 것일까? 나비가 비행하고 길을 찾는원리가 지구 자기장에 있듯이, 나비는 태생적으로 기의 흐름을 좇는다고 생각해서일까? 나비는 그것과는 무관하게 햇빛이나 태양의 고도를 이용하는것으로 알고 있다.나비는 매화 향 쫓아왔을 뿐이다.
허목(許穆)은 이조판서를 거쳐 영의정까지 오른 조선 후기 문신이다. 한때 의령에 살던 시절이 있었다. 1638년(인조 16년) 9월에 금산을 둘러보고 기(氣)와 관련하여 『범해록(泛海錄)』에 기록을 남겼다.
‘보리암 아래 바위 봉우리 일대에 산의 기(氣)가 쌓인 곳이라 한다.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태조가 등극하기 전에 무학대사를 따라와 산신령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菩提下石峯間。稱山氣積處。世傳太祖微時。從無學祭山靈云).’
전래된 이야기가 맞다고 하면, 금산에서 기가 센 곳은 탑대, 만장대가 될 것이다.
암각화를 뒤로하자 또 다른 나비가 기억 속에서 날아오른다.
“장주가 나비 된 꿈을 꾸었다가 다시 장주가 나비로 변하니 어떤 것이 진짜인지 구분 못하였다 하는데, 너 또한 그러하냐?”
육관 대사가 성진에게 설법하고 있다.
젊은 날 『구운몽』을 예닐곱 번 정독한 바 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이다.
구운몽의 저자 서포 김만중 선생 유배지가 금산에서 멀지 않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백련마을 앞바다에 떠있는 ‘노도(櫓島)’도 둘러보기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