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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운 Aug 05. 2021

관음포(上)

이락사에 대한 단상

 가끔 혼자 유적지 답사를 즐길 때도 있다. 채비가 간편할 뿐만 아니라 홀가분하고 무엇보다 찬찬히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어 좋다. 오늘 들린 이곳은 재정비 공사 후 주차장과 주변 시설들이 몰라보게 쾌적해졌다.     


 답사의 첫 코스는 안내판과 마주하는 것이다.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이라고 시작하는데 이것이 문화재청의 공식 이름이다.     

 “선조 31년 노량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이 순국한 곳이다.. 이곳에서 이충무공은 관음포로 도주하는 왜군을 쫒던 중 적탄에 맞고 순국하였다. 그 이후 관음포 앞바다를 ‘이충무공이 순국한 바다’라는 뜻에서 ‘이락파(李落波)’라고도 한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이 ‘이락사’와 ‘대성운해’라는 현액을 내렸다...”



 계단을 오르니 길 양옆으로 잔디 결이 고운 뜨락이 나온다. 초등학교 시절 소풍 와서 친구들과 술래잡기와 보물찾기 등 즐거웠던 기억이 스쳐간다. 두 번째 계단을 오르기 직전 오른편 큰 바윗돌(立石)은 근래(1998년)에 세워졌다. 충무공의 유언을 해군 참모총장 유삼남 대장의 글씨로 새겼다.  


 사당의 규모를 압도하는 이런 입석은 참배 공간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할 때 규모나 배치 측면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이충무공 서체는 무인다운 글쓰기의 전범으로 당대 호평을 받았다. 난중일기, 임진장초 등에 많이 남아있어 집자(集字)로 각자 했더라면 어땠을까.    

 

 사당 입구에 이르는 양 옆으로 육송들이 장졸처럼 도열해 있어 비장감이 흐른다. 세어보니 스무 그루인데 하나만 뺀 모두가 반송(盤松) 또는 만지송(萬枝松)으로 부르는 수종이 차지하고 있다. 무슨 연유가 있는 모양인데, 보다 정제된 분위기를 불러일으키려는 것일까. 몇 년 전에 왔을 때 소나무 아래에 맥문동 연보라 꽃들이 만개하여 매우 이채로웠다.    



 사당 입구에 ‘이락사(李落祠)’, 들어서자 비각에도 ‘대성운해(大星隕海)’라는 편액이 연달아 보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체라고 한다. 비각의 좌우 공간에 수령이 수백 년은 돼 보이는 우람한 소나무 서너 그루가 용틀임을 하고 있다. 사당 내부는 임란의 시공간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착각이 든다.     

 

 참배객의 편의를 위해 좌측 빈터에 유허비를 복제하고 기록을 국한문으로 풀어쓴 청동 안내판이 있다. 순조 32년(1832) 왕명을 받들어 예조판서 홍석주가 지었는데 주요 부분만 보면 이렇다.     

 ‘좌수영을 비롯한 여러 곳에 공적비나 사당이 있으나, 살신성인한 이곳에는 기념물이 없다. 네 번째 임진년을 맞아 임금은 당시 공을 세운 분들에게 제사를 하라고 했다. 충무공의 8 세손이자 삼도 수군통제사인 이항권은 왕명을 받들어 이곳에 제사를 지내고 주민과 상의해서 유허비를 건립한다. ’      

 

 언젠가 SNS에 올라온 어느 기고문이 눈에 띄었다. 타지에서 온 관람객이 ‘이락사’에 대해 소신을 밝힌 글이다.

  조선왕조를 ‘이왕가’라고 부르지 않듯이, ‘이락’이라는 어휘가 과연 조선시대에 통용되었을까? 일제강점기 때 망한 왕조라는 시각이 함축돼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다.


 남해의 노량 ‘충렬사’는 현종 4년(1663년)에 통영 ‘충렬사’와 같이 사액(賜額)을 받았다. ‘이락사’는 그런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승정원일기』순조 임진년(1832년) 2월 6일에 전교(傳敎)한 내용을 살펴봤다. 이항권이 왕명을 받아 충무공에 제사를 하고 유허비를 세운 그 시기다.

 “.. 충렬공 송상현, 문열공 조헌, 충렬공 고경명, 충무공 이순신 순절한 곳(忠武公李舜臣殉節之所) 등 목숨을 바친 장사들 모두 같이 제단을 마련하여 제사를 지내라.”

 비각을 세우게 하고 ‘이락사’ 사액을 내린다는 말은 없다. 더군다나 8세 손 이항권이 주도적으로 선조 사당을 지어 ‘李 씨가 죽은 곳(李落)’이라고 명명했을 까닭은 전무하다.    

 

 조선 중기 이후부터 금산이 명승지로 널리 알려져 유학자들의 남해 출입이 잦았고 문집들도 많이 남겼다. 한국 고전 DB에 들어가 ‘이락사’를 검색하니 나오지 않는다. 19세기까지는 전무하다가 그 이후 지역사회에서 불러진 것일까? 초등학교 때 어른들이 그러하듯 우리도 “이락포”, “이락사”라고 예사롭지 않게 불렀다.   

 

 『이충무공전집』에 들어가서 도승지 최유해의 글을 찾아보았다.

‘.. 공이 분향하고 축문을 드리기를, “이 원수들을 섬멸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라고 했다. 이때 큰 별이 갑자기 바닷속으로 떨어졌는데 그것을 본 이들은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公焚香祝之曰。此讎若除。死且無憾。俄有大星隕海。見者異之。.. -李忠武公全書卷之十>附錄二>行狀〔承旨崔有海〕)’    


 ‘대성운해(大星隕海)’가 여기서 나온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성(大星)⤍이(李), 운해(隕海)⤍락(落)으로 알기 쉽게 순화되어 지역민들이 사당 이름을 ‘이락사’로 부른 게 아닐까? 연결고리를 끊고 보면  ‘이락사’라는 이름이 생뚱맞고 심지어 상스럽게 들릴 수 있다고 본다.   


 임금은 사액을 내리지 않았지만, 오늘날 대통령이 ‘이락사’라고 사액까지 내렸으니 관례에 따를 것이지 웬 딴지를 거냐고 할지 모른다. 사당 입구에서 비각까지 ‘이락사’, ‘대성운해’라며 죽음 의미를 중첩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문화재청 홈피에서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을 찾아봤다. 소개 문구 중 바다를 이락파(李落波), 해안에 이락사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대표 사진은 근래에 세워진 건축물 ‘첨망대’ 하나만 올려놓았다. 우국충절을 기리는 유허비의 시대정신이 퇴색돼 보이는 것은 기우일까.     

  

 다음은 사당 뒤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걸으며 이충무공에 대한 단상들을 해보려고 한다. 생각 끝에 이르면 팔작지붕의 첨망대가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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