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락사에 대한 단상
가끔 혼자 유적지 답사를 즐긴다. 준비가 간편하고 마음이 홀가분하며, 무엇보다 찬찬히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오늘 답사한 곳은 재정비 공사 후 주차장과 주변 환경이 깔끔해졌다.
답사의 첫 코스는 안내판과 마주하는 것이다.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이라는 문화재청의 공식 이름이 적혀 있다.
“선조 31년 노량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이 순국한 곳이다.. 이곳에서 이충무공은 관음포로 도주하는 왜군을 쫓던 중 적탄에 맞고 순국하였다. 그 이후 관음포 앞바다를 ‘이충무공이 순국한 바다’라는 뜻에서 ‘이락파’라고도 한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이 ‘이락사’와 ‘대성운해’라는 현액을 내렸다..”
계단을 올라가니 길 양쪽으로 잔디가 잘 정돈된 녹지가 펼쳐져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함께 소풍을 와서 숨바꼭질과 보물 찾기를 했던 즐거운 추억이 떠올랐다. 두 번째 계단을 오르기 전 오른쪽을 바라보니 충무공의 유언이 새겨진 커다란 바윗돌(입석)이 눈에 들어왔다, 이 바윗돌은 1998년 해군 참모총장이 세운 것이라 한다.
사당의 규모를 압도하는 입석을 보며, 나는 참배 공간의 특성을 고려하더라도 규모나 배치에 아쉬움이 남았다. 이충무공 서체는 무인다운 글쓰기의 전범으로 당대에 호평을 받았다. 난중일기와 임진장초 등에 많이 남아있는 장군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새겼다면 더욱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사당 입구로 가는 길 양쪽에는 육송들이 줄지어 서 있어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중 대부분은 반송(만지송)으로, 정제된 분위기를 자아냈다. 몇 년 전 방문했을 때는 소나무 아래 맥문동 연보라 꽃들이 만발하여 매우 이채로웠다.
사당 입구에 ‘이락사(李落祠)’와 내부 비각의 ‘대성운해(大星隕海)’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필체라고 한다. 경내에는 수백 년의 역사를 간직한 듯한 우람한 소나무들이 자리 잡고 있어, 마치 임진왜란 당시의 시공간이 그대로 멈춰 있는 듯했다.
참배객들을 위한 배려도 돋보였다. 왼쪽 공터에는 유허비를 복제하고 기록을 국한문으로 풀어쓴 청동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순조 32년(1832) 왕명을 받은 예조판서 홍석주가 지은 글의 주요 부분만 보면 이렇다.
‘좌수영을 비롯한 여러 곳에 공적비나 사당이 있으나, 살신성인한 이곳에는 기념물이 없다. 네 번째 임진년을 맞아 임금은 당시 공을 세운 분들에게 제사를 하라고 했다. 충무공의 8 세손이자 삼도 수군통제사인 이항권은 왕명을 받들어 이곳에 제사를 지내고 주민과 상의해서 유허비를 건립한다.’
예전에 SNS에서 한 관람객이 ‘이락사’에 대한 자신의 소견을 밝힌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조선왕조를 ‘이왕가’라고 부르지 않듯이, ‘이락’이라는 어휘가 과연 조선시대에 통용되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일제강점기에 망한 왕조라는 시각이 반영된 것 같다는 주장이었다.
나 역시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여러 자료를 조사해 보았다. 현종은 1663년에 남해 노량과 통영의 <충렬사>에 사액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락사’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나는 『승정원일기』순조 임진년(1832년) 2월 6일의 기록을 살펴보았다. 수군통제사 이항권이 왕명을 받아 충무공에게 제사를 지내고 유허비를 세운 시기였다.
“.. 충렬공 송상현, 문열공 조헌, 충렬공 고경명, 충무공 이순신 순절한 곳 등 목숨을 바친 장사들 모두 같이 제단을 마련하여 제사를 지내라.”
순조가 비각을 세우게 하고 ‘이락사’라는 사액을 내렸다는 내용은 없었다. 더욱이 8 세손 이항권이 선조 사당을 지어 ‘이 씨가 죽은 곳(李落)’이라고 이름을 붙였을까?
조선 중기 이후 금산이 명승지로 알려지면서 많은 유학자들이 남해를 방문하였고, 그들의 문집에도 다양한 기록이 남아있다. 나는 한국 고전 DB에서 ‘이락사’를 검색해 보았지만, 관련된 내용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19세기 이후 어느 시점부터 지역사회에서 ‘이락사’라는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일까? 내가 초등학교 시절, 주변 어른들은 ‘이락포’, ‘이락사’라고 예사롭지 않게 불렀다.
나는 『이충무공전집』에서 도승지 최유해의 글을 찾아보았다.
‘.. 공이 분향하고 축문을 드리기를, “이 원수들을 섬멸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라고 했다. 이때 큰 별이 갑자기 바닷속으로 떨어졌는데 그것을 본 이들은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俄有大星隕海。見者異之)’
‘대성운해(大星隕海)’가 여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성(大星)이 이(李), 운해(隕海)가 락(落)으로 순화되어 ‘이락사’라고 불리게 된 것이 아닐까? 이러한 맥락을 고려하지 않으면 ‘이락사’라는 이름이 어색하고 심지어 불쾌하게 느낄 수도 있다.
임금이 직접 사액을 내린 것은 아니지만, 대통령이 ‘이락사’라는 현판을 내렸으니, 기존의 관례를 따르면 무슨 문제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당 입구에서 비각까지 ‘이락사’, ‘대성운해’를 강조하며 죽음을 부각하는 것은 불필요해 보였다.
나는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을 찾아봤다. 소개 문구에는 바다를 이락파, 해안에 이락사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홈페이지에서 게시된 사진도 근래에 세워진 건축물인 ‘첨망대’ 하나뿐이었다. 우국충절을 기리는 유허비의 시대정신이 퇴색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내려오는 길에 다시 한번 관음포를 바라보았다. 쉼 없이 포구로 바람이 불어오고 잔물결도 밀려들고 있었다. 이충무공의 정신이 지금 우리에게도 전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