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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운 Aug 17. 2021

관음포(下)

첨망대로 가는 길

 사당 뒤편으로 나 있는 오솔길을 호젓하게 걷는다. 오백 미터 정도 걸으면 노량해전 관음포 앞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첨망대가 나온다. 1991년 건립되기 전에는 낚시꾼들이나 다닐 뿐 관람은 유허비가 있는 사당이 마지막이었다.

 양옆으로 조성된 소나무, 그 아래 동백나무 군락은 일 년 전과 다름이 없으나 길바닥에는 어느새 등산로 매트가 깔려 있다.    

 

 그전 토사가 파인 산길 바닥은 소나무 뿌리가 심하게 노출돼 있었다. 그것을 보니 격전 당시 조선수군의 구리 빛 정맥이 떠올랐다. 사부와 격군의 불거진 핏줄이 소나무 뿌리로 남아 억척스럽게 우리 강산을 끌어안고 있었다.


 며칠 전 『난중일기』를 다시 읽어보았다. 변덕스러운 바다 날씨, 수많은 등장인물, 섬뜩한 형벌 등이 난무하는 가운데 일관된 흐름들이 보였다. 그중에 유독 세 가지가 눈에 띄었는데, 이충무공(이하 公)의 건강, 효성 그리고 부성애(父性愛)였다.   

   

무엇보다 먼저 이충무공의 병약한 모습이다.

 처음 증세의 발현은 개전(開戰) 10일 전으로 통증, 현훈, 탈기로 힘들어했다. 임진년이라는 특수상황 아래 일기의 분량도 적어 더 이상은 알 수 없었다.   

 

 이듬해(1593)부터 정유년(1597)까지 5년 동안 여러 병증을 일기에 남겼다. 위장약 온백원 복용부터 곽란, 구토, 극한 통증, 불면, 심지어 인사불성까지 갔다. 가장 많이 호소한 병증은 발한으로 심할 때는 옷은 물론 이불까지 흠뻑 적셨다. 정유년 가을 어느 밤에는 코피를 1되나 흘렀다고 했다.  

      

 이 정도면 병상일지나 다름없다. 병약한 몸으로 수많은 해상 전쟁을 수행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 그 원인을 살펴보기로 했다.

 하나는, 임진년(1592) 5월 사천 해전에서 어깨 부위에 탄환을 맞았다. 그래서 후유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총상에 대해 『난중일기』와 『징비록』은 조금 다르게 기술하고 있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난중일기』 - “나도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을 관통하였으나,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다(余亦左肩上中丸. 貫于背. 不至重傷).”

 『징비록』_  “날아오는 탄환이 이순신의 왼쪽 어깨에 맞아 피가 발꿈치까지 흘렀으나, 싸움이 끝난 후에야 칼로 살을 베고 탄환을 뽑아냈다(流丸中舜臣左肩 血流至踵 戰罷 始以刀割肉出丸).”   

 

 두번 째는, 학질(말라리아) 감염이 의심될 정도로 면역력이 약했다고 볼 수 있다. 전쟁 발발 3년이 되던 갑오년(1596) 1월, 병들어 죽은 군사 사백 여 구를 두 차례 걸쳐 묻었다고 『난중일기』에 나온다. 병명은 밝히지 않았으나 학질이 창궐한 탓으로 보인다.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나온다. 『선조실록』 병신년(1596) 2월 14일「경상우도 감사 서성이 장계하였다」는 제하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남 일대는 병화(兵火)와 여역(癘疫)을 거친 나머지 학질이 크게 번져 열 식구의 집이면 7~8명은 앓고 있어 겨울을 나는 동안 죽은 자가 많습니다. 전사(戰士)들도 대개 병에 걸려 페인이 되어 가는데, 도내에 약이 없어 치료할 방법이 없습니다. 특별히 해사(該司)로 하여금 약을 지어 보내주게 하소서.”   

 

 세번 째는, 전쟁 스트레스로 짐작된다. 전쟁의 불확실성, 주위의 시기와 모함, 무능한 조정 등 고립무원 상태에서 오는 과중한 책임의식으로 여겨진다. 높은 관직에서 백의종군인 만큼 두 번째 나락은 충격이 더 컸을 것이다. 이를 반증하듯 치솟는 울분을 일기에 고스란히 쏟았다.

 “일찍 아침식사를 하였는데 심정을 스스로 억누르지 못하고 통곡하며 보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公의 병약한 모습 다음으로 노모를 향한 지극한 효성이다.

 사나흘이 멀다 하고 팔순 노모의 건강을 챙겼다. 주로 본영을 오가는 탐색선을 이용하여 아들이나 조카, 종들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한때 노모가 이질에 걸렸다는 소식을 접하고 걱정이 되어 눈물을 흘렀는데, 사흘 뒤에도 안타까워 울었다고 했다.    

          

 정유년(1597) 4월 백의종군 왕명을 받고 남행하던 길에 선산이 있는 아산에 들렸다. 노모가 아들을 보기 위해 배를 타고 오던 중 선상에서 돌아갔다. 公은 뛰쳐나가 가슴을 치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장례도 못 치른 채, 길 재촉하는 이들에 의해 떠나며 통곡했다.

 “어머니 궤연(几筵)에 하직을 고하고 울부짖으며 곡하였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간에 어찌 나 같은 이가 있겠는가. 빨리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노모를 향한 애틋한 정은 천성에서 우러나는 것이겠지만, 두 아들(형)을 일찍 앞세운 노모의 상심을 덜기 위해 더욱 극진했으리라 짐작된다. 생전 노모는 公 앞에서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사로움에 연연하지 말고 어서 가서 장수의 소임을 다하라고 거듭 당부했다.   

 

 公의 모친상을 뒤늦게 안 체찰사(이원익)는 군관을 먼저 보내 조문했다. 公이 답례로 저물녘에 가서 뵈니 체찰사는 하얀 소복 차림에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 선비의 기품과 아취가 이러했다.


마지막으로 자상한 아버지다.

 막내아들 ‘면’이 피를 토하고 중태에 빠졌다는 말을 들었다. 차남, 의원, 측근을 포함 네 사람을 황급히 집으로 보냈다. 사흘 뒤에도 아들 병세가 걱정되어 글자를 짚으며 점을 처 보기도 한다.

 자식들을 육지로 심부름 보내 놓고, 바람이 차고 매서우면 돌아오는데 고생할까 걱정하는 마음이 여러 차례 보인다.


 한 번은 장남 ‘회’가 하인에게 곤장을 쳤다는 말이 들렸다. 公은 아들을 불러다가 뜰아래에서 잘 타일렀다고 했다. 자칫하면 진중에서 입소문이 날 수 있는 일이다. 젊은 혈기를 다독거리는 부정(父情)을 어렵사리 느낄 수 있다.


 차남 ‘울(蔚)’의 이름이 어느 날 ‘예(艹,亻,兌)’로 개명한다. 아버지가 늘 마음에 담고 있었다는 다. 그날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예’ 자의 소리는 ‘열(悅)’과 같고(※) 뜻은 움이 돋아나다, 초목이 무성하게 자란다는 것으로 매우 좋은 글자다.”

※ 悅(기쁠 열)은 중국 사성음 체계로 발음하면 yue로 우리말 ‘예’와 비슷하다.   

 

 나쁜 일은 한꺼번에 몰려온다고들 하던가. 모친상을 당한 그 해 10월 막내 ‘면’의 전사 서신을 받는다.

 “..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는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만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올바른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슬프다, 내 어린 아들아..”   

 公을 가장 많이 빼닮았다고 애지중지하던 막내가 그만 막심한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다. 사흘 뒤 새벽, 향을 피우고 하얀 띠를 두른 채 아비가 곡을 했다.    

 

 산길을 거의 온 것 같다. 산 능선이 우뚝 솟구쳤다가 바다를 보자 황급히 머리를 조아린다. 그 어깨 위 팔작지붕 첨망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누각에 올라보니 전방은 물론 좌우가 나무들로 가려져 답답하다. 삭막한 잿빛 광양 산업단지만 가까스로 보일 뿐이다. 문화재청 홈피에 들어 가보니 유적건조물은 관리단체가 남해군으로 돼있다.    


 왼쪽의 관음포구는 전란 때보다 절반 가까이 매립되었다. 일제강점기 공출과 농지면적 확보를 위해 간척공사를 한 결과다. 어릴 때 제방 수문 부근 개펄에서 심심찮게 화살들이 발견되곤 했다. 전란 때 포구 인근 마을 사람들이 대나무에 불을 붙여 마디 막이 터지는 소리를 냈다 전해진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 앞에 맞닥뜨린 公. 야간전투, 백병전, 조명 연합 전투, 협공의 위협들로 병법에서도 삼가는 전쟁. 公이 선상에서 분향 축문 후 새벽하늘을 한 번 우러러보지 않았을까.

“잘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야 한다.”

“아버지!”    


 올해 신축년 음력 11월 19일 다시 이 길을 찾아오고 싶다. 첨망대에 이르기까지 동백의 선홍빛 울음소리, 자애롭게 이를 다독거리는 보살의 목소리(觀音)가 들릴 것이다.  


【격전의 현장, 노량 관음포구 앞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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