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금산의 보리암은 우리나라 3대 기도처 중 하나로 잘 알려져 있다. 고려 말 이성계가 금산에서 백일기도 후 조선을 건국했다는 전설이 전해지지만, 조선 태조 기단(祈壇)은 금산 38경 중 하나(7경)에 불과하다.
이번 답사에서는 2경 문장암, 15경 쌍홍문, 20경 좌선대, 21경 삼사 기단, 27경 상사암, 28경 구정암, 바위에 새겨진 글자(각자), 금산산장 그리고 보리암의 나비 음각화를 둘러보기로 했다.
금산 들머리부터 산길은 완만한 오름길이었다. 이십 분가량 올라 계곡물을 건너는데, 한여름이면 시원하기가 얼음물 같았던 옛 기억들이 떠올랐다. 길옆에 쉼터가 보였다. 힘들면 쉬어가라는 관리공단의 섬세한 배려가 돋보였다. 쉬어간다는 것은 이제부터 전개될 험로에 대비해 힘을 비축하라는 의미도 포함될 것이다.
계곡물을 건너자 곧바로 돌밭의 급경사 길이 시작되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뒤돌아보니, 상주 해수욕장의 수평선이 떠오르는 착시 현상이 일어났다. 나는 가파른 등산길을 쉬엄쉬엄 오르면서, ‘우보천리’를 떠올리며 나잇살을 다독거렸다.
합성 데크로 된 계단 두 개가 연이어 설치된 구간에 도달했다. 계단을 다 올라 옆에 마련된 벤치에 앉으니, 맑은 솔바람이 불어왔다. 거친 숨을 가라앉히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나는 이 산을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오른 이후로 수없이 왔다. 이십 대 초반에는 친구들과 함께 상주 해수욕장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놓칠세라, 등산로 입구까지 20분 만에 뛰어 내려갔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그런 생각조차 엄두도 못 낼 것이다.
【사진 1 출처 : 素雲 Photo folder】
깔딱 고개에 들어서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 종아리에 납덩이를 매단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저 멀리 금산의 관문인 쌍홍문(雙虹門)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등산로 들머리로부터 오십여 분이 지났다.
안내문에 따르면, 쌍무지개처럼 보인다고 해서 원효 스님이 이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대단한 심미안을 가진 분이다. 내 눈에는 땅에 반쯤 파묻힌 해골처럼 보였다. 한때 천양문(天兩門)이라 불렸다고 하니, 그게 더 그럴싸하게 들렸다.
해골의 오른쪽 눈 속으로 오르는 돌계단을 다 올라 뒤돌아볼 때 느끼는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산 아래에서 올라오는 바닷바람은 산골짜기로 모여들다, 두 개의 눈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시원한 바람에 땀을 식히며 내려다보는 미조 앞바다, 조는 듯 한가로운 섬들, 에머럴드빛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수평선. 이 비경은 흘린 땀의 보상으로 내 품에 안겼다. 이 자리에 올 때마다 떠오르는 글귀가 있었다. 조선 중중 때 학자이자 명필로 유명한 자암 김구 선생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이곳 남해에서 13년간을 유배 생활했다. 그때 남긴 경기체가 중 『화전별곡』이 있다.
하늘의 끝이요, 땅의 변두리인 아득히 먼 신선이 사는 섬에는
왼쪽은 망운산이요, 오른쪽은 금산이라..
아! 하늘의 남쪽 경치 좋고, 이름난 곳의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기록에 의하면 683(신문왕 3)년 원효대사가 보리암 자리에 초당을 짓고 수도하던 중, 관세음보살을 친견하자 초당의 이름을 보광사(普光寺)라 불렀다 한다. 원효대사라 하면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 유학 가던 중 해골 물을 마시고 깨달음에 이른 일화가 있지 않던가. 쌍홍문도 해골 형상이니, 우연치고는 묘했다.
3개의 등산로 중 이 길을 택해 쌍홍문을 마주 보고 서면, 돌아갈 길이 없다. 골짜기 양옆으로 험준한 수직 절벽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보리암으로 가려면 반드시 이 문을 거쳐야 한다.
뒤돌아보니, 이 길은 인생행로와도 닮았다. 계곡물까지는 청년기, 쉬고 또 쉬던 때는 중년기, 기진맥진 상태로 쌍홍문에 다가오는 것이 인생의 후반부 같다. 쌍홍문은 내게 말을 걸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쌍홍문 우측 눈 아랫부분을 밟고 들어와 좌측 관자놀이로 빠져나가는데, 도중에 위를 쳐다보니 두정부 일부가 뚫려있었다. 선계 대라천(大羅天) 또는 불국정토 도솔천을 떠올리게 했다.
봉수대가 있는 산 정상까지 가야 금산 제2경 문장암을 볼 수 있기에, 마음을 다잡으며 길을 나섰다.
【사진 2 출처 : 素雲 Photo fold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