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추석은 연휴 전날 아내와 애들을 먼저 버스 편으로 내려 보냈다. 나는 모처럼 만난 고향 친구의 차를 같이 타고 가기로 했다.
핸들을 놓으니 그렇게 편안할 수 없었다. 국토 최남단까지 운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지루한 싸움이던가. 어렵사리 경부고속도로에 진입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다 서다 한다.
밤 9시가 넘었지만 정체는 좀처럼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갈 길은 까마득한데 아직도 천안을 못 벗어나고 있었다.
“안 되겠다. 국도로 빠져나가자”
깜박 졸고 있던 내게 친구가 말했다.
“응, 그래 봐”
국도로 빠져나온 후 조금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멀리 고속도로 위에는 긴 띠를 드리운 채 시간의 흐름조차 멈춘 듯했다. 끔찍했다.
“야! 진작 국도를 탈 걸.”
“그러게!”
이러한 맞장구도 잠시, 행렬이 주춤거리더니 다시 막히고 만다.
민가 불빛이 야산 아래 희미하고 양 들녘에는 벼이삭이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찔끔찔끔 숨죽여 가는 차 소리에 잠을 설치는 듯, 귀 밝은 벼는 이따금 몸을 비튼다.
친구도 졸리는지 말 수가 부쩍 줄어들었다. 자정을 넘어 어느 듯 새벽 1시, 얼핏 눈앞을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오른쪽으로 난 좁은 길로 차 한 대가 빠져나가는 것이 아닌가. 순간적으로 친구의 손등을 툭 쳤다.
“저것 봐! 샛길이야.”
친구는 내가 가리키는 차의 행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작심한 듯 핸들을 우측으로 꺾었다.
길은 좁다란 농로였다. 뒤돌아보니 그새 차 서너 대가 따르고 있었다.
“눈치들은..”
조그만 농촌마을 앞에 당도했다. 순간 앞서 가던 차를 놓쳐버렸다. 아니 이럴 수가! 우리가 헛것을 본 거야? 우리 뒤로는 연 꼬리가 제법 길게 매달려 있었다.
“이봐, 샛길 맞겠지?”
친구는 내 말을 못 들었는지 대꾸가 없다.
부디 마을을 벗어나는 길이 나와 줘야 하는데.. 천천히 골목길에 주차한 차들을 피해 두어 번 접어들자
“이런? 길이 아니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랬다. 바로 앞은 어느 농가의 대문이 딱 버티고 있었다.
“이게 뭐야.. 허 참!”
친구도 황당해 어찌할 바를 모른다.
“뭐해! 빨리 저 집 앞에 세워!”
눈치 빠른 친구는 내 의도를 알아챘다. 차를 대문 앞에 바짝 붙이고 그리고 엔진을 꼈다. 우리는 고향집에 당도하여 집 안으로 들어 선 것이다.
뒤 따라오던 차의 헤드라이트가 비췄다.
“엎드려!”
우리는 차 안의 바퀴벌레가 되었고, 헤드라이트는 숨어버린 양심을 찾고 있었다.
머뭇머뭇거리더니 이내 후진기어 소리, 어지럽게 교차하는 헤드라이트, 요란한 엔진 소리가 우리의 양어깨를 짓눌렸다.
조금 후 슬며시 고개를 들어보니 차들은 다 가고 없었다. 서로 얼굴이 마주쳤다. 참았던 웃음이 빵 터졌다.
“야! 다시는 네 말을 듣는가 봐라”
“이미 공범이야, 그런데 아까 그 차는 어디 갔어?”
설, 추석을 불문하고 고향까지 가는데 25시간이 걸린 ‘불멸의 대기록’은 그때 세워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