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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운 Aug 31. 2021

그림자 비

 큰집 마을 어귀에 들어설 무렵이다. 갑자기 굵어진 빗줄기가 ‘우두둑’ 온몸을 두들겨 패듯 퍼부었다. 사촌 누나들은 화들짝 놀라 내달린다. 어둑한 저녁인 데다 불어난 개천 물은 콸콸거리며 사납게 흘러내린다. 나는 그 자리에서 울어버렸다.    


 누나들이 되돌아와 날 내려다보는데, 하늘은 먹장구름이 몰려가며 빗방울을 매주 콩처럼 뿌려댔다. 조그만 보자기로 내 머리를 가리는가 하면 손을 붙들고 감나무 아래로 뛰었다. 겁에 질려 우는 날 다독거리며 잠시 숨을 돌렸다.

 다시 개천 위 다리를 건너 집으로 힘껏 달음박질했다. 천둥 치는 소리가 우리 뒤를 따라잡는 것만 같았다.     


 일곱 살 꼬마 이전에는 비가 그렇게 무서운 줄 몰랐다. 뇌성과 섬뜩한 번개에 땅바닥이 뒤흔들리고 빗방울이 그렇게 아픈 것을.     


   

 자다가 눈을 떠보니 식구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밖에는 빗소리가 요란스럽다.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진열장이 있는 넓은 마루로 나가자 아버님이 비단을 골라 큰 보자기에 싸고 있었다. 형과 동생은 옷을 갈아입고, 엄마는 부엌에서 살림을 정리하는 듯 그릇 소리가 들렸다.    


 짐을 잔뜩 메고 집을 나서는 아버님. 책가방을 챙겨 들고 뒤를 따랐다. 폭우가 휘몰아쳐 비닐우산 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 밤중에 어둠을 뚫고 산 아랫마을 큰집으로 대피하는 길이다.

 가다가 자꾸만 뒤돌아봤다. 행여나 엄마와 형제들이 따라오는지 걱정됐다. 아버님은 내가 뒤처지자 재촉하며 개천 가까이 가지 말라고 다그치신다.


 일제 강점기 때 저수지 둑이 터지는 것을 지켜본 아버님이다. 보강공사를 해서 더는 그런 사고가 없었지만 넓은 들을 지나는 하천 제방이 자주 터졌다. 일 년 전에도 붕괴하여 가게 마루와 부뚜막까지 물이 차올랐다. 집 바깥에 화로를 피워 식사는 거르지 않았지만, 학교 마치고 오면 부엌 물을 세수 대야로 퍼내야 했다.

     

 여름, 가을에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우울하기까지 했다. 4학년 가을 무렵 콘크리트 이층 집을 지어 입주하게 되는데, 이후 그런 증세는 말끔히 사라졌다. 오히려 폭우와 천둥이 치면 창문과 방 안을 뛰어다니며 스릴을 즐겼다.      


 그러나 호우는 만만치 않아, 늘그막에 날 찾아와 선연한 족적을 남기고 갔다. 불과 이년 전 일이다.


 연이틀 감정의 너울이 너무 커 간헐적으로 어깨와 팔이 부르르 떨렸다. 선채로 벽에 기대기도 해 보는데 가늘던 빗줄기가 어느새 장대비로 변하고 있다. 기피시설이다 보니 산으로 에워싸여, 빗줄기가 더욱 거세지자 사방에서 ‘우우’ 소리를 질러댔다.    

       

 화장장 화로가 일천 도 가까이 오르자, 부랴부랴 열기를 멈추기라도 하듯 바깥은 가을 폭우가 퍼붓고 있는 중이다. 불교에서 육신은 사대로 이루어졌다고 했던가. 지수화풍(地水火風) 중 일부는 지켜본 임종 때, 나머지도 화로가 꺼지면 홀연히 사그라질 것이다.   

 

 아버님을 회고해 보면 집념과 근면의 결집체였다. 유년기부터 서당을 접하다 보니 퇴임 후 서예에 더욱 심취하였다. 그 열정이 만년에 한 서예작품으로 영글었다. 10폭 병풍, 퇴계선생의 <성학십도>다.  

 ‘제일 태극도’의 개념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무극이면서 태극이다. 움직이고 고요함에서 음양이 생겨나니, 변화하여 오행을 낳는다. 각기 남녀의 성이 있어 만물이 생화하는 것이니..’    


 아버님은 몸소 필사(筆寫)한 ‘태극도’ 생성 순리를 거슬러 오르고 있다. 이제 곧 물과 불이라는 음양을 탈피하여 본향으로 나아가고자 할 것이다. 온갖 상념들이 버거운 중량으로 어깨를 짓눌렸다.    


마침내 겹쳐 보이는 물상들 사이사이 그림자처럼 비가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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