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운 Sep 14. 2021

시계탑

어머님의 수술

 입원실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스며드는 불빛에 놀라 일어나 앉는 어머니. 밤새 잠을 설친 모습이 역력했다. 가족이 다 모이니 아침 7시 반을 가리킨다. 간호사가 요도관 삽입, 채혈, 혈압 등을 체크하며 발걸음이 분주해진다.

“할머니?”

“응?”

“수술 잘 마치고 회복실에서 만나요.”

“고마워요, 아가씨.”

“날 못 알아보시면 안 돼요?”

순간, 짓궂다는 생각이 스쳤다.

“8시간 푹 자고 일어나면 깨끗이 제거된데.”

“그럼요, 명의로 소문난 분이니 걱정 마세요.”

아버님 말씀에 우리도 거들었다.  

  

이런 분위기는 문 앞 섬뜩한 금속음에 깨져버렸다.

'올 것이 왔구나.'

 입원실에 침대를 밀어 넣는 남자 간호사의 표정은 차가웠다. 가족이라는 품에서 어머니를 내놓아야 했다. 차가운 침대 난간을 붙잡고 따라나섰다.     


 칠십 중반의 어머님이 위험한 외과 수술을 받아 들어야 했다. 방치하면 시각장애라는 멍에를 피할 수 없다고 했다. 그건 가족을 뒷바라지해 온 어머니에게 너무 가혹한 대가였다.

 한편으론 양성 뇌 수막종인 데다 노인이면 진행이 더디기 때문에 관찰 관리할 수도 있다. 또는 후유증이 우려되는 개두술(開頭術)을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등 다른 소견을 내는 의사도 있었다.  

   

 해당 웹 사이트에서 뇌종양 환우회를 찾아 등록했다. 관련 지식도 인터넷에서 수없이 검색하고, 명의가 추천하는 명의를 나름 비교 분석도 해봤다. 긴 터널을 지나 수술이 불가피하다는 최종 결론에 도달할 무렵이었다.    


 수술 장 입구에 도착했다. 가족과 같이할 수 있는 마지막 선까지 온 것이다. 대기실 안에서 고개 들어 우릴 찾는다. 손을 흔들어 보였다. 직원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아버님은 들어가 손을 꼭 붙잡은 채 안심시킨다.    

 환자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손 놓고 뒤돌아 가족을 껴안고 우는 소녀. 환자에게서 시선을 못 떼는 초로의 아저씨. 입술을 꼭 깨문 채 대기실로 들어가는 중년의 고운 아줌마, 눈물이 흥건했다. 대기실에서 지정 수술실로 들어가기 시작하자 주위가 다시 술렁거렸다.  

  

 아침 여덟 시 수술이 시작됐다. 여섯 시간 경과 후 종양 제거가 성공적이라 알려왔다. 수술 아홉 시간이 지난 오후 다섯 시에 종료되어 중환자실로 옮겼다. CT 상에서 특이 사항이 없다는 것과 안정을 위해 강제 수면을 유도한다는 의사 소견이 있었다.    


 다음날 오전 면회를 신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자가 호흡을 시도하고 있는데 호흡 부조가 지속되어 좀 더 지켜보자는 것이다.

저녁 늦은 시간이다. 보호자 대기실에 있던 동생으로부터 다급한 상황을 알려왔다.

“.. CT 상 뇌부종이 심각하답니다! 강제 수면과 함께 항부종제를 투여 중이고..”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누워 잔다는 것이 용납이 안 되었다. 집안을 돌아다니다 새벽에 겨우 눈을 부쳤다.     


다음날도 상태가 호전되지 않아 강제 수면으로 이어졌다.


 수술 후 닷새 날 정오쯤 강제 수면 해제 사실을 알려왔다. 저녁 7시 면회가 허용되었다. 이곳저곳 모니터 비프 음을 들으며 병실로 들어섰다. 여러 부위에 붕대를 감은 환자들이 많았다. 격리 1인실 환자들까지 지나자 어머니 자리에 올 수 있었다.

 침대를 세워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머리에는 하얀 보호 망사를 쓰고 정수리에 가느다란 호스를 꼽은 채 눈을 감고 있다. 모니터에서 나온 선들이 어지럽게 몸에 부착되고 온갖 주사액이 혈관에 꽂혀 있었다.     


 고인 눈물이 가느다랗게 볼로 흘러내린다. ‘얼마나 두렵고 아팠을까!’, ‘혼자만의 힘으로 버텨내느라 얼마나 외로웠을까.’ 손등을 어루만졌다. 반응을 한다. 하얀 거즈로 눈까풀을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어머니 부르자 고개를 돌리려 했다.  


 이틀 후 일반실로 옮겼다. 모처럼 행복한 시간을 맞았다. 동생이 어머니에게 오천 원을 드리고, 물건을 사고팔며 거스름돈이 얼마냐 묻는다. 비교적 좋았다.

 십여 일이 지나자 또다시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중한자실로 향했다. 걸어 나가는 두 의사의 대화가 어깨너머로 들려왔다.

“스테로이드를 너무 빨리 줄인 게 아니야?”

“글쎄.. 그런지.”        



 그 해 2월은 추웠다. 눈도 잦았다. 난방을 너무 높여 복도 공기는 건조하고 답답했다.

“CPR팀, CPR팀은 외과 중환자실로 오시기 바랍니다.”

 방송이 끝나기 무섭게 의사 서너 명이 후다닥 뛰어나와 중환자실로 들어간다. 보호자들이 놀란 기색으로 여기저기 모여든다. 얼마 후 의사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각자 복도로 사라진다. 하루에도 여러 번. 맞은편 내과 중환자실은 검정 지프 백이 실려 나오는 횟수가 잦았다.    


 보호자 대기실에서 나와 복도를 거닐기도 했다. 무기력하고 암울한 시간이었다. 수술 결과를 너무 낙관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뇌수술 그것도 개두술이 그렇게 만만한 수술이던가.

 무덤덤하게 지나쳤던 병원 앞 시계탑이 그날은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날은 희끗한 중년. 함박눈이 오면 세파를 견뎌낸 노인장처럼 보였다.     


 황병기 선생의 가야금 ‘시계탑’의 창작 배경이 생각났다. 암 투병하던 시절. 한밤중 창밖으로 보이는 시계탑. 무척 아름다웠다고 했다. 비참한 현실을 뛰어넘고자 한 몸부림이 오동나무 위에 실현된 것이 아닐까.  


 절묘한 위치의 시계탑.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간절히 기도했을까. 지친 내 속내도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다. 롤러코스트 같은 어머니의 병세는 어떻게 될까. 묻고 또 물어봐도 응답이 들리지 않는다.

걸음을 뗐다. 복도를 오가다 다시 시계탑을 바라봤다. 긴 침묵으로 일관한다.    


 가까운 거리의 일반실로 다시 돌아오는데 닷새나 걸렸다. 기대와 달리 폭력적인 언행과 가성 치매 증세를 보이는 게 아닌가. 지켜보는 우리로서는 분하고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전두부를 들어 올린 후유증이 이렇게 오래갈 줄이야.

 지도교수는 시간이 갈수록 나아질 것이니 퇴원을 권했고 앞으로는 정신과 치료를 받아보라고 했다.   


 입원한 지 두 달 보름 남짓 지난 어린이날. 어머님은 퇴원했다. 신라호텔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장충단로 도로변에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던 날이다.

 서울 동생 집으로 두어 차례 옮겨 다니며 요양을 하신 후 아버님과 함께 지방 본가로 내려가셨다. 이후 불행한 가족사의 서막이 올려지는 것을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다. 부모님이 연차를 두고 치매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시계탑이 그토록 침묵한 이유일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꽃구경(下)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