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운 Sep 23. 2021

꽃구경(上)

  예전에 지인으로부터 장사익 6집 앨범 <꽃구경 2008>을 받았다. 우리 민족의 정서인 한을 파격적인 창법과 음색으로 잘 구사한다는 소리꾼이 아니던가. 내용이 너무 절절하여 늘 혼자 듣기 아까워했지만 지금은 아예 손사래를 친다.      


따뜻한 봄날

              - 김형영    


어머니, 꽃구경 가요.

제 등에 업히어 꽃구경 가요.    


세상이 온통 꽃 핀 봄날

어머니 좋아라고

아들 등에 업혔네.

(중략)

어머니, 지금 뭐하시나요.

꽃구경은 안 하시고 뭐하시나요.

솔잎은 뿌려서 뭐하시나요.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너 혼자 돌아갈 길 걱정이구나.

산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   


     

 어머님 뇌종양 수술 후 본가로 내려가실 때, 아버님은 이런 말씀을 남겼다.

“대학 4년 간 서울에서 자취도 해봤는데, 살림을 왜 못하겠냐?”    


 한 번씩 고향에 가보면 취사는 물론 장보기, 빨래까지 혼자서 다하셨다. 어머니 손잡고 운동장에 나가 걷기 운동도 했다.

 딱 거기까지였다. 이후 어머니 혼자 놔두고 아버님은 복지관, 한시(漢詩) 모임, 서예학원 등 외부활동을 하셨다. 어머님은 회복이 더디어 집안일은 엄두도 못 냈다. 그나마 정기 검진 차 서울에 오시면  한두 달 우리 집에 맡겨두고 혼자 내려가시기도 했다.   

   

 아버님의 이 힘겨운 노력은 2년 반을 버티다 결국 사달이 나고 말았다. 파킨슨 의심 소견으로 인천 모 종합병원에서 MRI, PET-CT 등 정밀검진을 했다. 파킨슨 초기 단계 의심(r/o), 국소 빈혈/경색증 그리고 측두부 지주막 낭종 소견이 나왔다.    

 

 한 달 보름마다 지방에서 오시면 파킨슨 진료와 처방을 받았는데 거의 1년을 그렇게 했다. 당신의 건강마저 위태로워지기 시작하면서도 외롭고 버거움 멍에만은  내려놓지 않았다. 그러나 의지만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굳건했던 초심이 서서히 침식되고 있는 것을 은연중에 우리도 느꼈다. 어머님도 치매 약을 3년 남짓 복용 중이나 진행을 막지는 못했다.    

 

 어느 날 아내더러 본가에 와서 살림과 어머님을 케어해 달라고 하셨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형제들과 상의한 결과 우리 내외가 부모님을 모시기로 했다. 연말 무렵 아내가 먼저 내려갔다.

 이듬해 봄, 아버님의 진료를 서울 모 대학병원으로 바꿨다. 담당 교수는 파킨슨 약을 복용할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약을 끊고 치매 처방으로 투약과 엑셀론 패치 10, 주사액 등으로 대치했다. 당시 병행한 인지기능 검사(MMSE-K)에서 치매 의심이 되는 수치(20)가 나왔다. 연말 무렵에 나도 하던 일을 정리하고 내려갔다.    

 

 돌이켜보면 부모님 말년을 함께한 5년 남짓한 세월, 부모님이나 우리에게 있어 특별한 나날이었다. 지워지지 않는 동행이었다. 같이 시장을 보자며 아버님이 몇 번은 따라 나오셨다고 했다. 상인들에게 ‘며느리가 객지에서 왔네.’ 자랑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간의 마음고생에 숙연해졌다.    

  

 아버님은 천자문을 떼고 추구(抽句)를 배우다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국립대학 사대에서 일반사회를 전공하였고 40여 년 간 교편을 잡았다. 퇴임 즈음에 문집 발간과 이후 지역신문 고정 칼럼니스트로 왕성한 사회 활동을 하신 분이다.     

 이른 새벽이면 반드시 운동장에 나가 40여 분 걷기와 달리기를 하셨다. 아침식사 후 컴퓨터 앞에 앉아 전날을 회상하며 일기를 썼다. 독서는 생활화되었고 그 양은 서재의 규모가 말해준다.  


 이런 분에게 치매란 당연히 모순되고 비합리적인 병증이다. 나름대로 추론을 해보곤 한다. 무엇보다 치매가 진행 중인 어머니 수발에 대한 스트레스다. 3년 남짓 혼자서 집안 살림을 다 했다. 그 당시 숙부님에게 실토한 속내가 이를 반증한다.

“말년이 이렇게 불운할 줄 몰랐네..”    


 또 하나는 50대 초반, 오토바이 타고 퇴근길에 넘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머리를 크게 다쳐 몇 시간 동안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파킨슨 검사 때 말해주듯 지주막 낭종은 선천적인 경우도 있지만, 두부 충격이나 출혈이 심할 경우도 발생한다고 한다.    


  요즘은 부부가 각방을 쓰는 것이 흠결이 아니다. 자식들이 다 성장하고 각기 취향이 다르다는 이유가 설득력을 지닌다. 하지만 부모님은 만년에도 꼭 한 방에서 주무셨다.

 아버님도 경도 인지장애를 보일 무렵이다. 주위에서는 잠자리만큼이라도 떼 놓으라고 하지만 현실을 모르는 말이다. 아버님은 완고했다.     


 우리가 본가에 합류했을 때, 어머님은 신종플루, 독감 등으로 해마다 입원 치료를 했다. 아버님은 새벽에 일어나 옥수수 뻥튀기나 벌꿀을 드시다가 주무시는 어머니 입에 넣어주는 일이 잦았다.    

 어느 날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우리를 불렀다. 이마에 열이 높고 눈을 뜨지 않은 채 의식이 혼미했다. 119를 불렀다. 흡인성 폐렴이었다. 지방병원에서는 불가능하여 진주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급히 이송하였다.  


 이후 아버님은 눈에 띄게 증상이 심해졌다. 잠자리에 어머님이 없으니 예전 우리가 살던 일산 집으로 착각하는 섬망 증세가 나타났다. 낮에 배회하는 거리는 길어지고 빈도는 잦아졌다. 위치추적기는 편리하기도 했지만 자주 말썽을 부렸고 교통사고 직전까지 간 아찔한 상황들도 있었다.    

 

 뭐니 해도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주무셨다. 새벽에 집안을 돌아다녀 큰방, 화장실, 주방 외는 방문을 걸어 잠갔다. 서랍마다 뒤지고 마당에서 뭘 자주 태웠다. 부근 가게에 들어가 횡설수설하는 바람에 간간이 핀잔을 듣기까지 했다.

아는 이웃이 어렵게 말을 붙여왔다.   

 

“그만 요양원에 모시지, 누구는 좋아서 모십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철부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