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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운 Nov 21. 2021

동백

“어머니, 더는 아프지 마세요. 응?”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귀에 대고 말했다. 처음에는 목소리가 또박또박했지만 다음에는 그렇지 못했다. 치매가 중증인 어머님은 날 알아보지 못한 지 꽤 오래됐다. 그나마 눈을 뜨면 내게는 운이 좋은 날이고 사진을 찍어 형제들과 공유하기 바쁘다.     


 병원에서 치료가 끝난 어머님을 옆 건물 요양원에서 곧 모셔간다 했다. 올해는 오월부터 벌써 다섯 번째 병원 신세다. 폐렴과 신우신염이 주요 증상인데 이번엔 폐렴이었다. 하지만 면역력이 바닥을 드러내는 거의 구순 노인이고 입원일수는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장기 입원에 배겨 날 장사가 어디 있겠는가. 어디를 가나 손에서 휴대폰을 놓치지 않는 게 습관화되었다.    

  

 집에 돌아오니 화단 가까운 마당 바닥이 매화, 사과며 석류나무가 떨궈낸 낙엽들로 무성하다. 뒤처리의 수고로움은 내게 베풀어준 벅찬 희열에 비하면 지나치게 부족한 것이다. 빗자루로 쓸 때마다 바스락거리며 코끝에 와닿는 게 있으니 외할아버지 곰방대에 다져진 봉초 기억들이다.     


 나무 가지들마다 누가 더 벗겨졌네 하고 호들갑을 떨어도 태연자약하게 내려다보는 양반이 있으니 동백이다. 날이 추워진 뒤에야 진면목을 드러낸다는 송백처럼. 예전 부모님이 심었던 것인데 이제는 훌쩍 자라 내 키의 두 배가 넘는다.   

          


선운사 동구

           -서정주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디다      

  

 아버님 2주기를 올 가을에 맞았지만 동백이 나를 그렇게 흔들어 놓지 않았다. 우리 집 동백은 어쩌면 어머님의 꽃이기에 그게 가능했는지 모른다.      

 

 어느 날 아버님 서재에서 흑백 사진을 우연히 발견했다. 약관의 부친, 방연 18세 모친의 결혼식 사진이었다. 크기가 14x10이니 요즘 같으면 칠순, 팔순에 사용하는 큰 사이즈 사진과 견줄만할 것이다.


 뒤로는 병풍을 둘려 가림막 역할을 하고 있는데, 아랫단은 산수화 그 위에 화조 병풍을 올렸다. 마당에 깐 멍석, 초석을 밟고 서있는 두 분. 두루마기 차림에 흔치 않을 운동화를 신고  치마저고리에 특이한 부케가 손에 들려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잎만 달린 동백나무 가지들이다.     


 웃음기는 물론이고 화실의 석고상처럼 굳어버린 표정에서 감정을 유추해 보기란 대단히 어려웠다. 그나마 이제 성인이 돼 혼례의식을 치른다는 진중함은 엿보였다. 내가 태동하기 전, 먼 옛날 일상사 중 단 1초의 시간을 도려낸 결혼사진. 몽환적인 이미지에 겹쳐 까닭 모를 서러움이 왜 묻어나는 것일까.

     

 오늘날 부케는 아름다운 또는 의미를 담은 꽃들을 다발로 묶어 신부 손에 쥐어진다. 그러나 부모님 결혼식은 초여름 7월 중순에 치려 졌다. 동백꽃이 다 진 계절이니 잎들만 무성한 것은 의심할 여지는 없다지만, 딴 꽃들도 많은데 왜 굳이 동백이었을까.

 가령 7월이면 참나리, 원추리, 접시, 백합, 심지어 무궁화도 핀다. 그럼에도 꽃도 없는 동백 잎 다발을 들고 있다. 사시사철 변함없는 동백 잎처럼 부부의 삶도 늘 그러기를 축원하는 의미가 아닐까.    


 마당에 나가 동백나무를 쳐다보니 이제 알겠느냐고 묻는 것 같다. 예로부터 양반들은 도화 빛 도는 복숭아나 꽃이 뚝뚝 떨어지는 동백나무를 집에 들이지 않았다. 우리 집 동백은 부모님의 지고지순한 염원이 서려 있기에 오래도록 나랑 같이 할 것이다.    


이 시간 요양원에서 말없이 누워계실 어머님.     


답답함에 겨운 동백꽃 몽우리들이 살포시 빨간 입술 드러내며 말한다.

‘할머니 우릴 기억해 보세요. 너무나 아름다웠던 그 시절을요.’

 얼마 후면 먼데 갔던 동박새마저 돌아와 포롱 포로롱 꽃잎을 넘나들며 목이 쉰 꽃들을 거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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