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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화 Oct 24. 2021

모태글쟁이의 낙원

아미엄마가 부르는 작은 수필2

 모태신앙이라는 말을 빌려서 나는 모태글쟁이라고 우기고(?) 싶었다.


 친정엄마가 나를 가졌을 때 입덧이 심해서 하루에 사과 한 알, 우유 한 잔, 식빵 한 조각 외에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고 한다. 구멍가게를 했던 엄마는 가게에서 팔던 것 중 그 세 가지만으로 열 달을 버텼다고 했다.


 그렇게 힘든 와중에 엄마는 매일 일기를 썼단다. 그때는 그게 그렇게 쓰고 싶었는데 내가 태어난 후론 몇 번 쓰지 않았으니 일기를 쓰고 싶다는 마음은 엄마 것이 아니라 배 속에 있던 내 것이 아닌가 싶다는 얘기다.


 그런 내가 작가를 꿈꾼 것은 어쩌면 운명이었다고 또 우기고(?) 싶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던 내게 엄마는 펄쩍 뛰면서 만류했다. 온종일 쭈그리고 앉아 팔 아프게 원고지만 축내봐야 굶어 죽기 딱 좋은 직업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엄마의 말에 내가 작가가 될 때쯤이면 글씨를 저절로 써주는 기계가 나올 거라고 말했단다. 엄마는 그 말을 듣고 코웃음을 쳤는데 컴퓨터가 나왔을 때 내심 깜짝 놀랐다고 아주 나중에야 말해 주었다.  


 


 여섯 살 무렵 부모님이 이혼해서 엄마와 나는 호적상으로 묶여있지 않았다. 엄마는 나를 두고 떠날 수 없었노라고 늘 말했다. 여덟 살 차이 나는 남동생이 태어나고 동생이 초등학교를 들어갈 때야 부모님은 호적을 다시 합쳤다. 고등학교 때 등본을 본 담임선생님은 엄마가 동생을 데리고 재혼한 줄로 알았다. 새엄마 밑에서 힘들게 사는 아이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라는 데도 항상 더 신경을 써 주는 눈치였다. 그런저런 환경 때문이었는지 나는 작가가 되면 굶는다는 엄마의 말이 항상 신경 쓰였다. 갖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욕심 많은 아이였던 나는 뭔가 확실한 직업을 가져서 돈 걱정이 없어지면 작가가 되는 공부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강권으로 상업고등학교를 갔지만 아버지 몰래 수능을 쳐서 전문대를 들어갔다. 책을 많이 읽었기에 수능 1세대라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어렵게 졸업을 했지만 IMF로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 어설픈 직장 생활로 여유로운 생활은 꿈꾸기 힘들었다.


 결국은 돈이 먼저가 아니라 하고 싶은 게 먼저라는 생각에 드라마작가 교육원에 들어갔다. 돈을 벌고 글을 쓸 게 아니라 돈을 벌 수 있는 글을 쓰자고 생각했다. 그런 면에서 드라마가 순수문학보다 내게 맞을 것 같았다. 엄마 말대로 굶으며 글만 쓸 수 없었기에 그나마 시간이 자유로운 문화센터 보따리 강사를 시작했다. 손수 만든 물건으로 좌판도 해 보았지만 신통치는 않았다.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로 겨우겨우 생계만 유지했다. 힘들었지만 그 모든 경험이 작가가 되는 밑거름이라는 자신도 있었다. 그렇게 20대를 온통 쫓기듯 공부하고 일하는 데 보냈다.  


 20대의 끄트머리에서 남편을 만났다. 갔다 오더라도 결혼은 꼭 하라는 엄마의 권유와 친정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결혼을 결심했다. “드라마작가는 결혼하면 좋더라, 이혼하면 더 좋고 재혼하면 더 좋다.”라는 드라마작가 교육원 강사들의 공통된 말도 결심을 부추겼다. 그렇게 시작한 결혼생활은 세 아이의 출산과 육아, 남편과 함께한 사업의 실패 등으로 또 쫓기듯 시간을 보내야 했다. 틈틈이 글을 쓰고 공부를 했지만, 드라마 공모는 매번 떨어지기만 했다. 그런 중에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들어갔고 우연히 아니, 어쩌면 운명적으로 수필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40대 초반에 오랫동안 병석에 계시던 부모님이 차례로 돌아가셨다. 글 쓰는 일을 그리도 말리던 엄마가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 병실에 누워 동인지에 나온 내 글을 보며 “그렇게 좋아하는 일을 반대해서 미안했다.” 하고 손을 잡아주셨다. 무겁게 심장을 짓누르던 뭔가가 떨어져 나가고 숨쉬기가 수월해진 기분이었다. 그렇게 수시로 들락거렸던 병원 출입이 끝나자 갑자기 한가해진 느낌이었다. 여전히 세 아이의 육아와 새로 시작한 남편의 사업을 돕느라 정신없는 와중이었지만, 인생의 절반쯤 되는 나이이니 쫓기듯 살아온 삶을 한 번쯤 돌아보고 싶었다.


 내 삶에 있어 ‘작가’라는 꿈은 너무도 간절한 바람이었다. 그런데도 이루어지지 않아 힘들었고, 잡히지 않아 절망했었다. 포기하려 할 때마다 뭐라도 써서 토해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 다시 움켜쥐어야 했던 삶의 이유였다. ‘수필가’로 등단하고 잡지에 내 글이 실리고 동인지도 나오면서 나는 ‘작가님’이라는 호칭을 들었다. 그렇지만 ‘글 값’으로 생계유지가 되는 프로작가가 되길 원했기에 허기를 채울 수 없어 목말랐다.  


 그런 고뇌 속에서 사춘기 때처럼 방황을 계속하는 내게 어느 날 큰딸이 불쑥 말했다.


 “엄마, 나는 엄마 존경해. 다른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지금 나이에 엄마 하고 싶은 거 하려고 공부하고 작가가 된 거잖아. 그게 제일 존경스러워.”


 울컥 치미는 눈물을 누르며 농담으로 얼버무리고 화제를 돌렸다. 그날 이후부터였을까. 방학 숙제를 하나도 하지 못했는데 내일이 개학날인 학생처럼 늘 초조하고 다급했던 마음에 차츰 여유가 생겼다. 그리곤 큰딸이 들어보라며 차에 꽂아준 CD의 노랫말이 들렸다.


 


꿈을 꾸는 게 때론 무섭네/ 그냥 이렇게 살아가는 게/ 살아남는 게/ 이게 나에겐 작은 꿈인데/ 꿈을 꾸는 게 꿈을 쥐는 게/ 숨을 쉬는 게 때론 버겁네/ 누군 이렇게 누군 저렇게 산다면서/ 세상은 내게 욕을 퍼붓네


-방탄소년단 <낙원> 중-


 


 방탄소년단은 그저 춤 잘 추고 잘생긴 남자아이들인 줄 알았더니 그들의 고뇌도 나와 다를 바가 없었다.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신할 수 있다. 그런 내게 세상은 돈 안 되는 헛된 꿈은 버리고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충고했다. 그러면서도 꿈은 이루어진다는 둥, 꿈꾸는 자가 아름답다는 둥 허파에 바람 뺄 틈을 주지 않았다.  


 요즘 나는 3분의 1쯤 꿈을 이루었다고 스스로 다독이고 있다. 나머지를 채우기 위해 이제는 천천히 가보려 한다. 남은 인생동안 또 3분의 1쯤 이루면 3분의 2가 되는 것이니 그 정도면 만족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열심히 꿈을 좇았던 만큼 아이들에게는 큰 정성을 들이지 못했다. 그래도 내 나름의 철학으로 최선을 다했다. 남들처럼 풍족하게 키우지는 못했어도 똑바르게 키우려고 애썼다.


 중학생이 된 큰딸은 이제 진로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 꿈이 수시로 바뀌었던 아이는 아직도 몇 번은 더 바뀌지 싶다. 꿈이 뭐라고 잘 말하지 않는 작은딸은 5학년인데도 아직 사춘기가 멀었는지 그저 해맑기만 하다. 솔밭에서 뛰어노는 게 제일 좋단다.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된 막내아들도 큰딸과 비슷한지 지금은 수시로 꿈이 바뀌는 중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을 방탄소년단이 멋지게 해주고 있다.


 


마라톤 마라톤/ 삶은 길어 천천히 해/ 42.195/ 그 끝엔 꿈의 낙원이 가득해/ 하지만 진짜 세상은/ 약속과는 달라/ 우린 달려야 해 밟아야 해/ 신호탄을 쏘면/ 너 목적지도 없어/ 아무 풍경도 없어/ 숨이 턱까지 넘칠 때/  


You need to you need to/ 멈춰서도 괜찮아/ 아무 이유도 모르는 채/ 달릴 필요 없어/ 꿈이 없어도 괜찮아/ 잠시 행복을 느낄 / 네 순간들이 있다면


-방탄소년단 <낙원> 중-


 


 모태 글쟁이인 엄마의 수필이나 잔소리보다 몇백 배는 효과적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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