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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화 Oct 24. 2021

홍구리당

홍구리? 숭구리?

 

 “내 이름은 당근이 아니라 ‘홍구리당당 홍당당 수리수리 당당 홍당무’야.”

 섭이가 여섯 살 때 엄청 열심히 보던 EBS 프로그램에 나오던 말이야. 엄마 어릴 때 어떤 코미디언이 숭구리당당 숭당당 어쩌고 하면서 개다리춤 추던 건데, 너희도 그 말이 재밌는지 볼 때마다 깔깔거리면서 좋아하더라? 

 한동안 우리 집에서 ‘당근’을 ‘홍구리당’이라고 불렀잖아. 시장에 다녀와서도 “너 좋아하는 ‘홍구리당’ 사 왔다.” 그러면 제일 좋아하는 반찬을 먹겠다며 섭이는 개다리춤을 추고, 은지는 엉덩이 살랑춤을 춰서 한바탕 시끌벅적해졌지. 때에 따라 어른을 사칭하는 큰딸은 ‘흥!’하고 말았지만.

 ‘홍구리’라고 부르든 ‘홍당무’라고 부르든 주황색 채소일 뿐이고 맛이 변하는 것도 아닌데, ‘당근’이 ‘홍구리당’이 되고 나서 싫어하는 채소 1위에서 좋아하는 1위가 되고 말았지.


 사람도 그런 거 같아. 

 그냥 ‘당근’이라고 싫어하며 별 것 아니라고 얕보다가 놀랄 때가 있어. 

 당근 속 베타카로틴이 항암작용을 한다는 것은 많이 알려져 있단다. 베타카로틴은 신체에 흡수되면서 비타민 A로 변형되어 눈 건강에 좋아 야맹증을 개선해주지. 장 건강이나 피부미용에도 좋단다. 

 물론 너희들에겐 이런 설명보단 그저 우스꽝스러운 춤과 리듬으로 ‘홍구리당당 홍당당’을 외치는 것이 호감도를 높인단 건 알지만. 

 엄마가 스물아홉 살 때 친구엄마가 소개해 준 어떤 ‘과장님’을 만났어. ‘과장님’은 영양학적으로 속이 꽉 찬 ‘당근’에 해당하는 사람이었지. 그런데 ‘홍구리당당’을 외쳐 호감도를 높일 줄 아는 사람은 아니었단다.

 맞아! 너희들 아빠야.

 언젠가 우리 큰딸이 물어본 적 있었지? 엄마는 왜 아빠랑 결혼했냐고. 아빠랑 처음 만났던 날, 콧구멍을 탈출하려고 덜렁대던 코털 얘기 하다 웃느라 미처 못 했던 얘기, 해 줄게. 

 아빠는 평범하게 사는 게 꿈이래. 자기가 하는 일, 옷 만드는 일로 어느 정도 성공이라 말할 수 있는 자리까지 올라가고, 주변 사람들이 도움을 청하면 도와주면서 가족들하고 오순도순 사는 거. 엄청나게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이 사람하고 살면 마음이 추울 일은 없겠구나 싶었어.     

 우리 큰딸, 작은딸이 태어날 때까지 ‘과장님’이었던 아빠가 한동안은 ‘사장님’이었잖아. 그때 아빠가 얼마나 바빴는지 하마터면 딸들 얼굴 다 잊어먹을 뻔했지. 막내인 섭이가 태어난 건 거의 기적이야. 무슨 말이냐고? 엄마아빠가 서로 사랑할 시간도 없이 바빴단 얘기야. ‘사장님’이었던 때는 우리 가족이 아주 힘들었지. 모든 면에서. 많은 것을 가지려다 잃은 게 더 많았던 시간이었어. 


 섭이가 일곱 살이 된 지금, 아빠는 ‘부장님’이야. 그리고 ‘당근’보다는 ‘홍구리당’에 가까운 사람이 되었어. 무슨 말이냐고? 아빠를 보면 알잖아. 너희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방구를 뿡뿡 껴대면서 장난을 걸고 많이 웃고 많이 안아주잖아. 

 너희는 어때? 어떤 아빠가 좋아? 영양 만점 당근 아빠? 개다리춤 추는 홍구리당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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