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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화 Oct 24. 2021

민낯으로 넘어지기

2017. 4. 동인지 <수수밭길을 걸으며> 수록

  늦은 시간, 너덜너덜한 몸과 마음으로 퇴근을 한다. 아이들 셋이 반갑게 달려들면 너덜거리던 마음은 곧 제자리를 찾지만 저질 체력은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쌓인 집안일을 모른 척하며 쉬려는데 큰딸이 태권도장에서 울었다며 품으로 들어온다. 집에서는 잘 울어도 나가서는 안 그런 아이라 조금 걱정이 된다. 이번 달 심사발표 때 하는 낙법을 실패해서 속상해 그랬단다. 지난달엔 제자리에 서서 낙법을 하는 것이었는데 이번 달엔 도움닫기를 한 후 엎드려 있는 두 아이를 뛰어넘어 격파와 동시에 낙법을 하는 것이란다.

  나는 체력도 저질이지만 요즘 흔히 말하는 몸치여서 태권도를 꾸준히 하는 딸이 참 대견스럽다. 성격이나 성향도 나를 많이 닮았고 하는 짓도 내 어릴 적 모습과 꼭 같은데 어쩜 저리 태권도를 좋아하는지... 게다가 사범님께 ‘우리 도장 에이스’라는 말을 들었다며 더 열심이던 참이다. 그런데 못난 엄마의 유전자 탓에 겁이 많아서 친구들 둘을 뛰어넘으며 낙법을 하는 것이 두렵다는 것이다. 한번 손을 삐끗한 적이 있어서 더 무섭다며...

  밤늦도록 아이를 달래며 내가 계속 반복한 말은 ‘괜찮아.’이다. ‘못해도 괜찮아.’ ‘그럴 수도 있어. 괜찮아.’ ‘넘어져도 괜찮아. 많이 아프지 않을 거야.’ ‘친구들 위로 넘어져도 괜찮아. 너희들 서로 말 타는 놀이도 하잖니.’ 실패할까 두려운 마음, 다칠까봐 무서운 마음을 한참 다독여준다.

  괜찮다는 말을 하다 보니 그 말이 내 자신에게 더 와 닿는다. 큰딸을 키우면서 내 어린 시절이나 내 마음을 들여다볼 때가 많다. 나도 뭐든지 잘하고 싶은 욕심이 능력을 앞서곤 한다. 힘들고 버겁다. 어린 시절부터 마흔이 넘어 아이들을 키우는 지금까지도 그렇다. 능력이 10이면 항상 20을 채우고 싶은 욕심이 스스로를 힘들게 한다. 딸을 보면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 못할 수도 있고 못해도 큰 탈이 나는 게 아닌데 늘 욕심을 부리고 힘들어 한다. 그 모습에서 나를 본다. 그래서 아이에게 해준 수많은 ‘괜찮아.’는 내 자신에게 들려주는 ‘괜찮아.’이다. 늘 바쁘게 사느라 힘들어하면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나에게 말이다.

  서툰 엄마여도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풍족한 생활은 아니어도 아이들과 웃을 수 있는 삶이니, 오늘 할  일을 못 끝내도 내일이 있으니, 결과가 흡족하지 않아도 과정에서 충분히 노력했으니, 괜찮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사는 게 뜻대로 되지 않고 늘 힘들었던 건 스스로를 너무 닦달하며 살아서 그런 거라고. 이제 아이에게 해준 말처럼 괜찮다고 다독이며 살살 살아보라고. 듣고 싶은 말을 내가 나에게 들려준다.

  딸의 욕심은 순수하게 잘해서 칭찬받고 싶은 욕심이다. 순수함과 멀어진 나의 욕심은 그런 대견한 마음에서 나온 게 아니다. 못생긴 얼굴의 콤플렉스를 감추려 민낯을 내놓지 않고 덕지덕지 두터운 화장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꼴이다. 내세울 것 없는 환경에서 치열하게 살았다는 것으로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리고 싶은 거다. 내가 서 있는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못 가진 것만 바라보기에 그렇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신이 가치 있고 소중한 사람임을 믿는다는데, 자존심만 세서 그런지 스스로 가치를 찾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얕보일까 싶어 가진 능력보다 더 잘해보려고 버둥거리며 산다. 그러니 남들이 내 덕지덕지한 마음을 예쁘다고 봐줄지, 꼴불견이라고 할지까지 걱정해야 하는 그런 욕심이다. 그럼에도 민낯으로 나설 자신은 없는 못난이.

  혹시라도 딸이 내 그런 못난 마음까지 닮을까봐 두려움이 훅 밀려온다. 그래서 괜찮다는 말끝에 물어본다. 혹시 네가 실수하면 친구들이나 구경 온 부모님들이 비웃을까봐 창피해서 그런 거냐고. 딸은 역시 그런 것도 있다고 대답한다.

  나는 딸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얘기한다.

  “사람들은 너의 실수를 오래 기억하지 않아. 물론 그 당시에는 웃을 수도 있을 거야. 그렇지만 지난 달이나 그전에도 실수한 아이들은 있었고, 엄마는 그게 누구였는지 기억 못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야. 다만 엄마는 네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 알기 때문에 네 실수를 안타까워하겠지. 중요한 건 실수해도 계속 도전하면 언젠가는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 그런데 포기하면 그때는 실수가 아니라 실패가 되는 거야. ‘이번 달은 심사에 안 나갈 거야. 실수하는 모습은 보여주기 싫어.’ 그렇게 포기만 안하면 돼. 엄마는 네 노력에 박수를 칠거야.”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하는 순간도 오지만 벌써 그것을 말하고 싶진 않다. 아직은 포기보다 도전을 가르치고, 그런 슬픈 순간이 닥칠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길러주고 싶다. 그리고 그런 때가 오면 그저 곁을 지켜주고 싶다. 딸은 이번 달 심사는 안 나가고 싶지만 한 번 더 도전해 보겠다고 한다. 나는 그 모습을 꼭 봐주기로 약속한다.

  부족한 환경이지만 자존감이 높은 아이로 키우려면 나부터 자존감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밤잠을 설친다. 이제 겨우 초등학교 3학년인 딸에게 너무 어려운 주문을 했나 걱정도 된다.

  나도 꼭 지금의 딸애 나이 때부터 작가를 꿈꾸며 달려왔다. 지금은 삶이 힘들다는 핑계가 쌓여 초심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이제 꿈을 위해 달리는 것인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달리는 것인지, 그저 살려고 달리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장애물 앞에서 다시 도전해보라는 격려를 듣고 싶은지도 모른다. 아직은 실패한 게 아니다, 언젠가 성공할 수 있을 거다, 그런 격려 말이다.

  약속한 날, 일을 서둘러 마치고 도장을 찾는다. 조금 긴장한 모습의 딸에게 엄지를 들어 보여주고 자리에 앉는다. 낙법차례가 되었지만 딸은 도움닫기를 준비하는 아이들 사이에 서지 않는다. 설마 포기한 걸까 걱정하며 딸을 보지만, 아이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한차례 낙법이 끝나고 한 명이 더 나와 세 명이 엎드린다. 딸은 낙법의 도움닫기를 하려는 아이들 뒤로 줄을 서고, 자신의 순서가 되자 격파와 동시에 낙법을 해낸다. 걱정과 달리 딸의 낙법은 멋지다.

  이제 내 차례다. 넘어보자. 딸아이가 실수했더라도 아니, 실패했더라도 내게는 누구보다 소중한 사랑하는 딸이다. 성공하고 잘할 때만 으쓱하지 말고 실수하고 실패하는 나도 소중히 여긴다면 넘어 볼 용기가 생길 거다. 이왕이면 깔끔한 민낯으로 뛰어보자. 겁먹고 쭈뼛거리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넘어져도 괜찮으니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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