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안전한 사회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주면 안 되겠니......
“저벅, 저벅, 저벅.”
집으로 향하는 골목에 들어서자 몇 발자국 앞에서 군복 입은 남자의 발소리가 들렸다. 한겨울, 버스 첫차에서 내려 들어선 컴컴한 골목에서는 가로등 불빛도 으슬으슬 한기를 뿜어 댔다. 남자가 뒤따라오면 무섭지만, 앞에 가고 있으니 별일 없겠지 싶은 마음으로 골목에 들어섰다.
100m가 채 안 되는 골목을 지나면 개천을 건너는 다리가 나오고, 다리만 지나면 바로 우리 집이었다. 그런데 걸어가던 남자는 개천으로 내려가는 모퉁이에 멈춰 서더니 노상 방뇨를 시작했다. 술 취한 것 같진 않았는데, 뒤에 누가 오는지 몰랐나 싶어 민망한 마음에 빠른 걸음으로 남자를 지나쳐 개천 위 다리를 건넜다. 그 순간 갑자기 뒤에서 뛰어오는 군화 소리가 났다. 대문 앞에 도착했을 때 군화 소리도 바로 뒤에서 멈췄고 남자의 손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놀라 대문을 마구 두드렸고, 안에서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그대로 도망갔다. 고등학생 때 일이었다.
그때는 부처님 성도재일마다 다니던 절의 학생회에서 천 배 기도를 했었다. 겨울방학이라 성도재일 일주일 전부터 종일 절에서 살다시피 했다. 기도하다 지치면 친구들과 놀고, 너무 노는 건가 하고 찔리면 방학 숙제나 공부도 하고, 그러다 밤늦게 집에 돌아오곤 했다. 어떤 날은 절에서 아예 밤을 새우거나 쪽잠을 자고 아침에 오기도 했었다. 새벽까지 시간을 보내다 지쳐 첫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던 날 벌어진 일이었다. 인신매매가 한창 TV를 달구던 때였다. 못 말리는 사춘기를 보내는 딸을 감당하기 힘들었는지 엄마는 그 이후에도 밤낮 가리지 않고 쏘다니는 나를 말리지 못했다.
20년이 넘어도 기억할 정도로 그 순간은 무서웠지만, 바깥에 나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낯선 남자의 구둣발 소리보다 새벽마다 다투는 부모님의 목소리가 더 힘들었으니까. 위험한 바깥세상보다 안전한 우리 집이 내게는 더 어두운 공간이었다. 표면적인 상처보다 내면에 새겨진 흉터가 더 오래 아팠다.
40대가 된 나는 그 동네, 그 집에 다시 살게 되었다. 친정살이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부모님 나이가 되니 고달픈 삶을 살아 내느라 자식들의 자잘한 생채기까지 돌볼 여유가 없었던 그분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작은딸이 버스 정류장 앞 가게에 과자를 사러 다녀오는 길이었다고 한다. 골목에서 어떤 아저씨가 주먹을 휘둘러서 맞을 뻔했단다. 무서워서 도망쳤는데 다행히 따라오지는 않았단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보다 골목은 더 환해졌고, 개천 아래는 산책로가 생겨 그곳을 건너는 다리는 더 크고 좋아졌지만, 여전히 골목은 무서웠다.
지금은 그때보다 미디어가 더 발달해서 딸 키우기 무서운 세상임을 더 널리, 자주 알려 준다. 물론 무서운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아이들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모든 것을 살펴 줄 수는 없다. 어릴 때야 그렇게 한다지만 어린 딸만 위험한 것도 아니고, 다 큰 딸이나 아들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다. 다만, 우리 집이 안전하고 밝은 공간이 되길 바라며 노력한다.
아이 셋을 키우면서 어떻게 직장 생활하고 공부까지 하느냐고 친구들은 걱정했지만 내 대답은 한결같았다. 아이들은 알아서 크고 있다고…….
초등학교 3학년이 된 작은딸은 12월 31일에 미숙아로 태어났었다. 8주나 먼저 나오면서 하루 차이로 나이까지 한 살 더 먹게 된 둘째에 대한 내 기대치는 낮았다. 그저 건강하니 고맙고, 웃으니 예쁠 뿐이다. 그런 둘째가 여섯 살 막내아들을 데리고 심부름을 다녀왔다. 친구랑 놀다가 저희끼리 가지 않고 동생도 데려간다며 나섰다. 손 꼭 잡고 누나들 말 잘 들으란 잔소리를 붙여 내보냈다.
아이들은 알아서 잘 컸다. 방향만 제시해 주면 스스로 판단해서 그 방향으로 가기도 하고 새로운 방향을 만들어 가기도 했다. 아직은 어리지만 그때 그 나이만큼의 판단을 하고 행동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실수하는 것은 또 그 과정으로 배워 나갔다. 그 과정 중 돌이키지 못할 큰 실수가 없기만을 바라고 기도했다. 다행히도 아직 큰 탈 없이 잘 커 줬다. 그런 아이들을 위험하다는 이유로 감싸 안고만 있을 순 없었다. 힘든 일을 겪지 않고 세상을 살 수는 없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다. 단단한 마음을 가진 아이들로 키우다 보면 어떤 일을 겪어도 잘 헤쳐 나가리라 믿는다.
건널목에서 길을 건너는 중이었다. 맞은편에서 예닐곱 살쯤 된 남자아이가 깡충거리며 혼자 길을 건너고 있었다. 둘러보아도 아이의 보호자로 보이는 어른은 없었다. 사실 길을 건너기 전부터 아이가 초록불을 기다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이는 혼자 심부름이라도 나온 듯 길 건너 제 갈 길을 가 버렸다. 나는 아이가 내 시선에서 벗어날 때까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언제부턴가 혼자, 혹은 보호자 없이 아이들끼리 다니는 모습을 보면 유심히 지켜보았다. 내 아이들도 저렇게 다니겠지 하면서……. 내가 건널목에서 아이에게 눈을 떼지 못했던 것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아이를 보는 듯해서였다. 또 나처럼 그렇게 지켜봐 주는 어른의 눈이 내 아이들에게도 따라붙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하다.
안 보이지만 잘하려니, 괜찮으려니……. 그런 믿음만으로 직장을 다니고 내 생활을 했다. 보이면 내 아이든 남의 아이든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그러니 안 보이는 편안함을 택한 나는 이기적인 엄마다.
내가 뽑은 새 대통령이 걱정 없이 아이를 밖에 내놓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주면 좋겠다. 고달픈 삶으로 자식들 마음 생채기까지 챙기기 힘들었던 부모님만큼은 아니지만 지금 우리네 삶도 어렵다. 오늘이 어제보다,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거라는 희망이 있으면 좋겠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없다면 사람들의 마음은 당연히 편안해진다. 고졸이든 대졸이든 어떤 직업을 가지든 안정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다면 공부만 잘하는 괴물을 만들려고 돈과 시간을 쏟아부을 엄마는 없어질 거다. 공부하는 목적도 달라질 거고, 목표도 ‘성공’이 아닌 ‘행복하고 여유로운 삶’이 되지 않을까. 그런 평안한 사회라면 범죄율도 줄어들 것이고 주위 아이들을 눈여겨 봐주는 시선도 늘어나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 아이들이 보이든 안 보이든 항상 편안할 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