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지금은 고3이 된 딸아이는 넘어지고 깨지며 세상과 맞짱뜨는 중이다.
늦은 시간, 너덜너덜한 몸과 마음으로 퇴근을 했다. 아이들 셋이 반갑게 달려들면 너덜거리던 마음은 곧 제자리를 찾지만, 저질 체력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쌓인 집안일을 모른 척하며 쉬려는데 큰딸이 태권도장에서 울었다며 품으로 들어왔다. 집에서는 울어도 나가서는 안 그런 아이라 조금 걱정이 됐다. 이번 달 심사 발표 때 하는 낙법에 실패해서 속상해 그랬단다. 지난달엔 제자리에 서서 낙법을 해야 했는데 이번 달엔 도움닫기를 한 후 엎드려 있는 두 아이를 뛰어넘어 격파와 동시에 낙법을 해야 했단다.
나는 체력도 저질이지만 요즘 흔히 말하는 몸치여서 태권도를 꾸준히 하는 딸이 참 대견스러웠다. 성격이나 성향도 나를 많이 닮았고 하는 짓도 내 어릴 적 모습과 똑같은데 어쩜 저리 태권도를 좋아하는지……. 게다가 사범님께 ‘우리 도장 에이스’라는 말을 들었다며 더 열심이던 참이었다. 그런데 못난 엄마의 유전자 탓에 겁이 많아서 친구들 둘을 뛰어넘으며 낙법을 하는 것이 두렵다고 했다. 한 번 손을 삐끗한 적이 있어서 더 무섭다며…….
밤늦도록 아이를 달래며 내가 계속 반복한 말은 “괜찮아.”였다. “못해도 괜찮아.” “그럴 수도 있어. 괜찮아.” “넘어져도 괜찮아. 많이 아프지 않을 거야.” “친구들 위로 넘어져도 괜찮아. 너희들 서로 말 타는 놀이도 하잖니.” 실패할까 두려운 마음, 다칠까 봐 무서운 마음을 한참 다독여 주었다.
괜찮다는 말을 하다 보니 그 말이 나에게 더 와 닿았다. 큰딸을 키우면서 내 어린 시절이나 내 마음을 들여다볼 때가 많았다. 나도 뭐든지 잘하고 싶은 욕심이 능력을 앞서곤 했다. 힘들고 버거웠다. 어린 시절부터 마흔이 넘어 아이들을 키우는 지금까지도 그렇다. 능력이 10이면 항상 20을 채우고 싶은 욕심이 자신을 힘들게 했다. 딸도 그랬다. 못 할 수도 있고, 못 해도 큰 탈이 나는 게 아닌데 늘 욕심을 부리고 힘들어했다. 그 모습에 내가 있었다. 그래서 아이에게 해 준 수많은 “괜찮아.”는 나 자신에게 들려주는 “괜찮아.”였다. 늘 바쁘게 사느라 힘들어하면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나에게 말이다.
서툰 엄마여도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풍족한 생활은 아니어도 아이들과 웃을 수 있는 삶이니, 오늘 할 일을 못 끝내도 내일이 있으니, 결과가 흡족하지 않아도 과정에서 충분히 노력했으니, 괜찮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사는 게 뜻대로 되지 않고 늘 힘들었던 건 자신을 너무 닦달하며 살아서 그런 거라고. 이제 아이에게 해 준 말처럼 괜찮다고 다독이며 살살 살아 보라고. 듣고 싶은 말을 들려주었다.
딸의 욕심은 순수하게 잘해서 칭찬받고 싶은 욕심이다. 순수함과 멀어진 내 욕심은 그런 대견한 마음에서 나온 게 아니다. 얼굴이 못생겼다는 콤플렉스를 감추려 민낯을 내놓지 않고 덕지덕지 두꺼운 화장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꼴이다. 내세울 것 없는 환경에서 치열하게 살았다는 것으로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리고 싶은 거다. 내가 서 있는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못 가진 것만 바라보기에 그렇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신이 가치 있고 소중한 사람임을 믿는다는데, 자존심만 세서 그런지 스스로 가치를 찾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얕보일까 싶어 가진 능력보다 더 잘해 보려고 버둥거리며 살았다. 그러니 남들이 내 덕지덕지한 마음을 예쁘다고 봐 줄지, 꼴불견이라고 할지까지 걱정해야 하는 그런 욕심이다. 그런데도 민낯으로 나설 자신은 없는 못난이.
혹시라도 딸이 내 그런 못난 마음마저 닮을까 봐 두려움이 훅 밀려왔다. 그래서 괜찮다는 말끝에 물어보았다. 혹시 네가 실수하면 친구들이나 구경 온 부모님들이 비웃을까 봐 창피해서 그런 거냐고. 딸은 그런 것도 있다고 대답했다.
나는 딸에게, 그리고 나에게 얘기했다.
“사람들은 너의 실수를 오래 기억하지 않아. 물론 그 당시에는 웃을 수도 있을 거야. 그렇지만 지난달이나 그전에도 실수한 아이들은 있었고, 엄마는 그게 누구였는지 기억 못 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야. 다만 엄마는 네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 알기 때문에 네 실수를 안타까워하겠지. 중요한 건 실수해도 계속 도전하면 언젠가는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 그런데 포기하면 그때는 실수가 아니라 실패가 되는 거야. ‘이번 달은 심사에 안 나갈 거야. 실수하는 모습은 보여 주기 싫어.’ 그렇게 포기만 안 하면 돼. 엄마는 네 노력에 손뼉 칠 거야.”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하는 순간도 오지만, 벌써 그것을 말하고 싶진 않았다. 아직은 포기보다 도전을 가르치고, 그런 슬픈 순간이 닥칠 때 다시 일어설 힘을 길러 주고 싶었다. 그런 때가 오면 그저 곁을 지켜 주어야지. 딸은 이번 달 심사에는 안 나가고 싶지만 한 번 더 도전해 보겠다고 했다. 나는 그 모습을 꼭 봐 주기로 약속했다.
부족한 환경이지만 자존감이 높은 아이로 키우려면 나부터 자존감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밤잠을 설쳤다. 이제 겨우 초등학교 3학년인 딸에게 너무 어려운 주문을 했나 걱정도 됐다.
나도 꼭 지금의 딸애 나이 때부터 작가를 꿈꾸며 달려왔다. 지금은 삶이 힘들다는 핑계가 쌓여 초심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이제 꿈을 위해 달리는 것인지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달리는 것인지, 그저 살려고 달리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장애물 앞에서 다시 도전해 보라는 격려를 듣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실패한 게 아니다, 언젠가 성공할 수 있을 거다, 그런 격려 말이다.
약속한 날, 일을 서둘러 마치고 도장을 찾았다. 조금 긴장한 모습의 딸에게 엄지를 들어 보여 주고 자리에 앉았다. 낙법 차례가 되었지만, 딸은 도움닫기를 준비하는 아이들 사이에 서지 않았다. 설마 포기한 걸까 걱정하며 딸을 보았지만, 아이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한차례 낙법이 끝나고 한 명이 더 나와 세 명이 엎드렸다. 딸은 낙법의 도움닫기를 하려는 아이들 뒤로 줄을 서고, 자신의 순서가 되자 격파와 동시에 낙법을 해냈다. 걱정과 달리 딸의 낙법은 멋졌다.
이제 내 차례다. 넘어 보자. 딸아이가 실수했더라도 아니, 실패했더라도 내게는 누구보다 소중한, 사랑하는 딸이다. 성공하고 잘할 때만 으쓱하지 말고 실수하고 실패하는 나도 소중히 여긴다면 넘어 볼 용기가 생길 거다. 이왕이면 깔끔한 민낯으로 뛰어 보자. 겁먹고 쭈뼛거리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넘어져도 괜찮으니 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