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했던 노을 속에서 마주한 환상 같던 순간
집과 직장 모두 옮기고
새롭게 시작한 곳에서
24년 8월 처음 여름휴가를 맞이하였다.
보통 내가 다니는 제조공장 중소기업은
다른 회사와 맞춰서 쉬기 때문에
여름휴가가 대부분 극성수기였다.
그럴 때면 친구와 일정을 맞춰서
함께 해외여행을 다녀오거나
때로는 가족들과 소소하게 시간을 보냈다.
그 해 여름휴가도 친구와 일정이 맞으면
함께 한국 근처 어디든 떠나기로 했다.
하지만 낯선 동네의 이질감에
새로운 직장에서의 적응과
주기적인 어깨통증까지
여러 가지 스트레스가 쌓여
혼자 훌쩍 떠나고 싶었다.
그래도 친구와의 여행은 여름휴가 때가 아니면
불가능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함께 가려 했지만
친구가 도저히 일을 못 뺄 상황이 되면서
내가 바라는 대로 혼자 떠날 수 있게 되었다.
혼자 휴가를 보낼 수 있게 되자마자
곧바로 바다가 보이는 남해 호텔로 예약했다.
사실 바다는 부산에 살면서
마음만 먹으면 보러 갈 수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혼자 멀리 떠나서
한적한 바다를 보며 조용히 힐링하고 싶었다.
보드를 타러 다니며 운전도 많이 늘었고,
차도 있으니 못 갈 이유가 없었다.
여름휴가 당일이 되자마자 남해로 떠났다.
두 시간 반을 달려 남해 충렬사를 지나
여름휴가 3박 4일 동안 나에게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 줄 호텔에 도착하였다.
호텔은 몽돌해변인 장항해수욕장이 있는
한적하고 조용한 남해 장항마을에 있었다.
호텔 앞에 산책할 수 있는 큰 공원과
운동시설이 갖추어진 큰 스포츠파크가 있었고
옆으로 보면 남해 푸른 바다가 보였다.
호텔방에 들어서니 테라스에서
잔디와 나무가 가득한 공원과
푸른 바다 풍경을 함께 볼 수 있었다.
가만히 서서 풍경만 보고 있어도 좋았다.
폭염에 초행길 장시간 운전피로가 겹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테라스 풍경을 보며 방에서 쉬었다.
멍하니 창밖만 보며 누워있는데
해 질 무렵이 되자 테라스 너머 하늘이
온통 핑크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아름답게 물들어가는 노을에 반해
바로 호텔 앞 바닷가로 뛰쳐나갔다.
방안에서만 보기 너무 아까운 풍경이었다.
호텔 뒤편 사잇길을 따라가니
몽돌해변인 장항해수욕장이 나왔다.
해변가에 잠시 앉아있다 보니
안쪽에 부둣가가 보였다.
‘저기까지 가볼까?’ 하는 생각에
5분 정도 더 걸어 들어가니
해안가 끝에 있는 장항부두에 도착했다
부둣가에 보니 해 점점 저물어가며
어둑해진 하늘 아래 해안선을 따라
핑크빛 노을이 그림같이 아름답게 걸려있었다.
온 하늘의 핑크빛이 물결 따라 출렁이는 바다에
반사되며 물들어가는 풍경을 보니
도저히 그냥 갈 수 없었다.
흙먼지 가득한 바닥에 그대로 앉았다.
옆으로 벌레가 기어 다녔지만
눈앞에 펼쳐진 빛나는 풍경을 보기 위해
먼지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바다를 바라보며 이어폰을 낀 채
예성 정규 1집 Sensory Flows를 듣던 중
9번 트랙 '환상 (Mermaid)'이 흘러나왔다.
'I've been feeling lonely now
단지 꿈이었을까
아직 내 마음은 일렁이는데
난 바다인 줄 알았던
작은 유리컵 속 Love
모두 엎지르고 나서야
깨달은 Truth
넌 위태로운 날
맴돌면서 빛난 거야
그 환상 앞에 난
홀린 듯이 다가가
So fill my heart with your dream
And I can't find emptiness
찬란하던 그 계절이
두 손에 넘쳐흐르지
So just stay in paradise
모든 걸 잊고 잠겨 난
아직도 I'm thinking of a dream
Where it's just you and me'
파도소리와 함께 예성의 '환상'을 듣자
눈앞의 펼쳐진 핑크빛 노을과
그 빛을 머금은 바다가
제목 그대로 환상처럼 느껴졌다.
마치 후렴구 가사처럼
힘든 일을 다 잊고 행복한 꿈을 꾸게 만드는
파라다이스 같은 곳에 있는 것만 같았다.
사실 여름휴가라 들뜬 마음으로
놀러 온 게 아닌 도망치듯이 남해로 왔다.
나를 짓누르는듯한 일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었다.
어깨수술 후 잠시도 쉴틈이 없었다.
퇴원 직후부터 인수인계로 바빴고
정리되자마자 양산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곧바로 새로운 회사로 이직했다.
이직한 직장에서의 적응은 쉽지 않았다.
짧은 인수인계 기간 탓에
혼자 파악해야 할 업무가 많았고
경력직이었던 나에게 배타적인 분위기는
여간해서는 견디기 어려웠다.
숨이 막히는 듯한 상황이 계속되어도
내가 유지해야 하는 생계를 생각하면
직장을 쉽사리 그만두거나 또 옮길 수는 없었다.
그리고 수술 후 휴식이 없었던 게 화근이었을까
어깨 통증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매일 망치로 어깨를 때리는듯한 고통이 계속되었다.
회사에서는 내 아픔이 짐이 될까 봐
내색조차 할 수 없었다.
가끔 들 수밖에 없는 무거운 박스조차
그 어깨로는 크게 무리가 되었지만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 못하는 상황이었고
그저 아픈 걸 참고 일할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는 씩씩한 척했지만
밤이 되면 어깨고통이 더 심해지면서
매일 자기 전 혼자 눈물로 보냈다.
유일하게 답답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시간이 8월의 여름휴가였다.
도망치듯 떠나온 남해에서 듣게 된
예성의 '환상 (Mermaid)'은
장항부둣가의 아름다운 핑크빛 노을과 어우러져
힘든 일상을 잊게 해 주는 듯했다.
그저 앉아서 노래만 듣고 있어도 좋았다.
그 순간만큼은 어깨에 짊어진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기분이었다.
노을이 지고 밤하늘이 어두워지면
꿈만 같았던 시간이 끝나는 게 아쉬웠다.
이 시간을 계속 간직하고 싶어서
다음날도 해가 바다로 내려앉을 즈음
어김없이 장항부둣가로 향했다.
그리고 또다시 부둣가 바닥에 앉아
노을 지는 바다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환상 (Mermaid)'만 반복해서 들었다.
어느새 남해에서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이 순간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마지막이라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해가 저물어 가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소중한 시간을 간직하기 위해
시간에 맞춰 장항부둣가로 갔다.
도착했을 때, 마침 붉게 타오르던 태양이
해안선 위 구름 속으로 스며들며
하늘과 바다를 온통 주황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오래 앉아있기 위해 가져온 비닐을 깔고
부둣가 바닥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저물어가는 노을을 바라보며
남해에서 지내는 3일 동안 나에게 위로가 되어준
'환상 (Mermaid)'을 틀었다.
마지막날에도 환상같이 빛나는 노을이
바다를 물들이고 있었다.
해가 해안선에 가까워질수록
꿈같은 시간이 점점 끝나가고 있었다.
남해에서 장항부둣가 노을을 보며
'환상'을 듣던 이 시간만큼은
내가 늘 붙잡고 싶었던 평온함이 있었다.
마지막날은 이 순간이 영영 사라지는 것만
같아서 찬란한 노을을 보면서도 아쉬웠다.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알 속에 있는
꿈같은 현실에 있는 것만 같은 공허함이 가득했다.
다음날이 되면 다시 삭막하고 힘든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현실이 슬펐다.
'두 눈을 감으면
여전히 난 너의 바다
그 안에 있잖아
아직 사라지지 마
So fill my heart with your dream
And I can't find emptiness
차오르는 네 흔적이
계속 날 적셔오겠지
So just stay in paradise
마르지 않는 꿈을 꿔
여전히 I'm thinking of a dream
Where it's just you and me
You and me'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라는 내 마음과 달리
해가 점점 지며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항상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
노래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들어도
언제나 마지막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지는 해가 해안가 가득 주황빛으로 물들이는
풍경을 바라보며 '환상'을 들을 땐
가만히 눈을 감고 있어도 좋았다.
남해 밤바다의 바람이 살랑살랑 뺨을 스쳤다.
인적 드문 조용한 바닷가에서
혼자 조용히 예성의 노래를 들으며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아름다운 낙원 같은 이곳에서 잠시나마
내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환상 같은 이 순간이 깨지지 않길 바랄 정도로
현실을 생각하면 그저 답답했다.
사실 지금까지 해왔던 무역일을
다신 하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지금 당장 어떤 걸 할 수 있는지
답을 내리지 못했다.
설상가상 어깨를 다쳐 수술까지 하게 되며
직장을 정리하고 이사까지 하게 됐다.
당시 내가 해결해야 하는 생계를 생각하면
여유롭게 공백기를 가질 시간이 없었다.
결국 등 떠밀리듯 늘 해왔던 무역일로
다시 이직을 했지만 적응하기 힘든 환경과
끊임없이 반복되는 어깨고통 때문에
힘들고 울컥할 정도로 슬픈 날이
계속되어도 버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직장생활의 힘든 건 익숙해질 때도 됐지만
그만큼 버겁고 힘든 현실이었기에
눈앞의 아름다운 노을을 보며 노래를 듣는
이 순간이 더욱더 꿈같은 환상처럼 느껴졌다.
도망치듯 떠나온 남해 여름휴가에서 만난
장항부둣가 아름다운 노을과
이곳에서 들은 예성의 '환상 (Mermaid)'은
잠시나마 현실에서 벗어나
행복한 꿈 속에서 지낼 수 있게 해 준 것만 같았다.
꿈같은 시간이 끝나고 다시 현실로 돌아갔다.
여전히 벅찬 현실이 반복되었지만
그래도 눈을 감으면 남해 장항부둣가에서
행복했던 시간이 떠오른다.
부둣가 바닥에 앉아 그저 한없이 바라보았던
온 하늘과 바다를 물들이며 빛나던 노을과
내 마음을 알아주듯 이야기해 주며
그 시간을 함께했던 예성의 노래 '환상'
그래도 그때의 환상 같던 시간을 생각하면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힘든 시간들을 견딜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작게나마 희망을 가져본다.
나도 내 꿈과 내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남해 장항부둣가를 가고 싶을 때마다
훌쩍 떠나듯 갈 순 없지만
그 순간이 그리울 때마다 예성의 '환상'을 듣는다.
나에게 현실을 잊게 해 주었던
환상 같던 그 순간을 떠올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