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고 헤매던 때에 만난 군산시내 노을
여름이 끝나가고 가을이 시작될 무렵 22년 9월 말,
이직준비가 한참이던 때에 친구와 군산으로 여행을 갔다.
직장을 못 구하고 쉬고 있을 때라
심적으로 불안한 시기였지만
일을 쉴 때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을 포기할 수 없었다.
바로 '평일여행'이다!
북적이는 인파에 치이는 주말과 달리
평일엔 비교적 한적하고 여유롭게 여행을 할 수 있다.
이럴 때 기분전환도 할 겸 여행을 가야 한다.
마침 예전부터 일정 맞춰서 같이 여행 가자고 했던
프리랜서 친구가 있어서 평일에 함께 일정을 맞췄다.
친구는 서울, 나는 부산에서 각자 출발해
선선한 가을날의 여행지 군산에서 만났다.
군산에 도착하자마자 유명한 짬뽕도 먹고
이성당에서 빵과 달콤한 밀크쉐이크도 먹고
군산 항쟁관, 동국사, 신흥동 일본식 가옥,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지 초원 사진관까지
친구와 둘이서 걸어 다니며 신나게 놀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에
바람이 시원한 가을의 군산을 마음껏 만끽했다.
화창한 가을의 햇살을 듬뿍 받으며
여행의 즐거움을 느끼던 낮 시간이 지나고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내가 앉아있던 호텔 침대 오른편에 난 창문 너머로
군산 시내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주황빛 노을로 아름답게 물들어가는
군산에서의 가을 저녁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노을빛이 점점 산등성이 너머로 사라지며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자
잠시 꺼져있었던 근심걱정의 버튼이 다시 켜졌다.
친구와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놀러 온 군산에서
무거운 걱정은 날려버리고 신나게 보내려 했지만
노을빛이 점점 사라지면서 어둠이 짙게 내려앉자
다시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노을 지는 어두운 창밖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예성의 'Corazón Perdido (Lost Heart)'를 들었다.
'길을 잃었나 봐요
처음 그곳에서
내가 알던 사람은
이제 없는 거겠죠
그때는 몰랐죠
이렇게 짧을 줄
Oh Mi Corazón
그 끝을 봤나요
Oh Mi Corazón
준비할 시간도 없이
그대 날 떠나가나요
새로운 걸 찾아
연약했던 약속은
이미 깨져버렸고
혹독한 계절만이
날 기다리네요
그때는 몰랐죠
이렇게 짧을 줄'
처음 들었을 땐 그저 이별 노래라고만 생각했지만
그때는 이 노래만이 유일하게
길을 잃고 쓸쓸해하던 내 마음을 표현해 주는 듯했다.
당시 나는 이제 뭘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한 상태였다.
30대에 들어서자 내 의지와 무관하게
연달아 악재가 터지기 시작했다.
4년을 함께한 회사의 폐업,
2년 다닌 회사의 해외이전으로 인한 퇴사
이후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이직했던
회사의 경영악화로 인한 해고까지.
3번이나 회사사정으로 인한 퇴사를 겪게 되자
이 길이 내 길이 맞는 걸까라는 의문과 함께
내가 하던 일에 대해 회의감 마저 들었다.
마치 하늘에서 이제 이 일을 그만할 때가 됐다고
나에게 메시지를 던져주는 것만 같았다.
다른 분야의 일을 해보려고 시도도 했었다.
재택근무를 하는 CS팀 업무도 해보고
경력이 없던 분야의 회사에서 신입의 마음으로
첫 시작을 해보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새로운 시도조차 실패하자 갈피를 잡지 못했다.
결국 길을 잃었다.
인생의 방향키를 놓친 기분이었다.
더 이상 예전에 알던 내가 없었다.
패기 넘치고 열정적이던 나는
이제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내가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았다.
'미녀와 야수'를 보면 벨의 아버지 모리스가
발명대회를 가며 두 갈래의 갈림길을 마주하게 된다.
한쪽길은 햇살이 내려쬐는 따뜻한 길
다른 한쪽길은 스산한 어둠이 내려앉은 숲길이였다.
모리스는 햇살 가득한 밝은 길을 뒤로한 채
지름길 같아 보이는 어두운 숲길을 선택하게 된다.
내가 마치 미녀와 야수 속 모리스처럼
두 갈래의 갈림길에서 잘못된 선택으로
칠흑같이 어두운 숲길을 걷고 있는 듯했다.
내가 걷고 있던 길을 지나면
새로운 희망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길의 끝에는 실패가 기다리고 있었다.
모리스가 야수의 성을 맞닥뜨리게 된 것처럼.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듯했지만
나에게 주어질 거라 생각했던 기회와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믿음
모든 게 나에게서 등을 돌리고 떠나가는 듯했다.
결국 차갑고 냉정한 현실과 혹독한 시련만 남았다.
함께 여행을 온 친구는 일찍이 목표했던 꿈을 이루고
그 분야에서 경력도 점차 쌓으며
착실히 본인의 길을 잘 걷고 있었다.
일을 쉬던 나와 달리 친구는 휴무를 내고 온 거라
창밖만 멍하니 바라보던 나와 달리 바쁘게
본인의 업무일정을 체크하고 있었다.
내 자리를 잃어버린듯한 나와는 달리
친구는 안정적으로 본인의 인생을 살고 있었다.
순간 나는 지금껏 뭐 했나 싶은 자괴감마저 들었다.
대학졸업 후 대학원에서 계속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어려운 집안형편으로 대학원진학을 포기하게 되며
내가 이루고자 했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급하게 언어공부를 해서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이왕 무역으로 시작한 거 이 분야에서 잘 해내고 싶었다.
하지만 열심히 하고자 했던 내 의지와 다르게
상황이 매번 안 좋게만 흘러가고
결국 3번이나 타의에 의해 퇴사하게 됐다.
다시 일어나 보려 새로운 일에 도전도 해봤지만
그마저도 실패하게 되자 막막해졌다.
이제 뭘 해야 할지 답을 찾지 못했다.
그저 어둡고 캄캄한 숲길을
혼자 하염없이 걷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시간은 계속 빨리 가
잡을 수 없게 멀리 가
네가 떠나 버린 자리는
계속 비워둘 수밖에 없네
다른 이유가 뭐 필요해
내겐 아무것도 없는데
마지막 네 모습도
언젠간 흐려지다 사라지겠지
찬 바람 불 때면
널 잊지 않고 떠올리겠지
나른한 기억으로
오랫동안 남아줘
나른한 기억으로
오랫동안 남아줘'
가사처럼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가고
나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함께 있는 친구에게 조차
어둡고 무거운 마음을 꺼내 보일 수 없었다.
집에서도 친구 앞에서도 잘 지내는 척했지만
사실은 깊은 어둠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내 마음처럼 점점 어두워져 가는
군산에서의 밤하늘을 보며
해가 지고 노을빛이 사라질 때까지
예성의 'Lost Heart'만 하염없이 반복해 들었다.
'Lost Heart'는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고
차마 말할 수 없어서 혼자 속으로
꾹꾹 눌러 담고 있는 나를 대신해
슬픈 절규를 토해내는 듯했다.
혼자 조용히 창밖만 바라보며
괴롭고 절망스러웠던 내 마음을
예성의 노래에 실어 조금이나마 흘려보냈다
그리고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는 듯했다.
억지로 이겨낼 필요 없다고.
힘들 땐 힘들다고 소리쳐도 괜찮다고.
마치 예성의 노래는 그런 내 옆에서
조용히 내 무거운 마음을 묵묵히 들어주고 있었다.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군산 여행이 마무리되고
다시 나의 허탈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길을 잃어버렸던 미녀와 야수의 모리스가
벨과 함께 해피엔딩 결말을 맞이한 것처럼
나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며
끝나면 좋겠지만 내 인생은 동화 같지 않았다.
그래도 마냥 어둠 속에서만 빠져있지 않게 되었다.
지나간 일로 슬퍼하고 괴로워한들
그 시간은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
실패하면 또 어떤가
다시 일어나서 시작하면 된다.
인생에서 내가 걷는 길은 마냥 꽃길만 이어지지 않는다.
햇빛이 따스한 길을 걷다가도
어둡고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는 길을 걷기도 한다.
당시 나는 어두운 길로 들어섰을 뿐이고
그 길을 잠시 걷고 있었던 거라 생각한다.
그래도 치열하게 부딪히고 방황하던 시간을
그저 슬프게만 여기지 않고 추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 그럴 때도 있었지
그땐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한 치 앞도 안 보이고 막막하던 시기였는데 하면서.
지금도 예성의 'Lost Heart'를 들으면
당시 한없이 무겁고 쓸쓸한 마음으로
멍하니 노을 지는 군산의 밤하늘을
보고만 있었던 그때가 생각난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그저 혼자 삼키기만 했던 나에게
힘들 땐 이렇게 얘기해도 된다고 말해주며
조용히 내 옆을 지켜 준
예성의 노래와 함께했던 그 시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