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를 읽고
이 책을 읽고 독서모임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며, 누군가 잊고 있었던 토론 시간의 기억을 떠올렸다. 원활한 토론을 위해
2:2 혹은 3:3으로 그룹을 나누었다. 한 가지 쟁점 아래 찬성과 반대 편에 서서 주장과 근거를 주고받았다.
가끔 가위바위보에서 져 내가 동의하지 않는 입장에 설 때가 있었다. 납득하지 못한 편에 서서 말을 할 때면 여러 감정
을 느꼈다. 스스로 주장이 억지스럽다고 느끼고는 했다. 내 말에 내가 설득되지 않아 말하는 동시에 답답하기도 했다.
그러다 가끔, 동의한 적 없는 주장이 약간 이해될 때가 있었다. 백번 양보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기분이 들었다. 남의
신발을 신는다는 표현이 들어맞았다. 언제 남의 신발을 신어 보겠나. 억지로라도 남의 신을 신고 나니 그 사람의 고충
이 이해되었다.
남의 신을 신으면 불편하다. 발 사이즈도 안 맞고 디자인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몇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착용감이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신을 함부로 꺾어 신지는 않는다. 남의 신이기 때문이다. 내 신발을 누군가 꺾어 신지 않으면 좋겠다. 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그의 신을 소중히 다루길 원하지 않을까. 아무리 불편하더라도 말이다. 남의 신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남의 입장에 억지로 서서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을 변호하던 때에 그의 입장을 소중히 대하는 자세를 배웠을 것이다. 영 맞지 않는 신발이지만 신을 꺾어 신는 결례는 저지를 수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