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다시 산다는 말은 무슨의미인가?
고전문헌학자이신 은사님과 함께 도반들과 지금은 사라진 언어인 아람어로 마가복음을 읽어냈다. 지난 10주는 너무도 소중했다. 마가복음의 끝에 다시 살아난 예수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은유인지 상징인지 알 길은 없다. 물리적으로 그때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끝에 십자가 형을 받아 죽은 그가 다시 살아났을 때 내가 느낀 감동은 진짜다. 나만 느낀 감동이라는 표현이 옳겠다. 어릴 적 교회 어른들이 네가 반드시 느껴야 한다고 말하던 감동이 아니었다. 오직 나만 느낀 감동이었다. 아주 개인적인 감동은 부활이라는 결과 이면에 자리한 고통이라는 과정에서 왔다.
나를 포함한 인류가 자주 잊는 사실이 있다. 나는 곧 죽는다. 눈을 떠 세상에 던져진 날부터 나는 죽음을 향해 달리는 누군가다. 너무 단번에 죽으면 당황스러울 수 있으니 신은 내가 잠을 통해 죽음을 연습하도록 도왔다. 매일밤 죽음을 서서히 경험하는 누군가다. 원하지 않아도 찾아오는 죽음의 신. 잠은 실은 내게 잊지 말아야 할 진리를 외치는 알람이었던 것이다. 너는 곧 죽는다! 너는 곧 죽는다! 곧 죽으므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2000년 전 이야기 속 예수도 이 진리를 깨닫고 매일 죽었다. 잠에 들어 몸도 죽었지만 마음도 죽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고통을 겪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그의 카리스마에 이끌려 따르던 친구들이 전부 배신한다. 내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줬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선다. 신은 바깥이 아닌 내 안에 있다고 주장했을 뿐인데 로마에 반역을 꾀하는 정치범으로 몰려 억울하게도 십자가 형을 진다. 무엇보다 슬픈 사실은, 그가 죽을 때 단 한 사람도 옆에 없었다는 점이다. 반역자인 그에게서 이제 더 이상 얻을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과연 이 이야기 속에서 그는 부활을 확신해 고통의 시간을 견뎠을까?
어떤 개신교 신자들은 그가 겪은 죽음을 부활이라는 찬란한 성과를 위한 통과 의례 정도로 보겠지만 나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다. 부활에 도달하기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죽음 속에서 매 순간 부활을 경험한 것이다.
2000년 후 한국 땅을 성과주의가 지배하면서 사람들이 짊어진 일상의 십자가는 먼 훗날 찾아올(지도 모르는) 찬란한 부활에 이르기 위한 KPI 정도로 여겨진다. 십자가는 삶의 의미를 가르치는 선생의 역할을 잃고 성과에 이르는 측정 지표로 전락한다. 그래도 괜찮다. 참고 견디면 곧 부활하니까. 부활하면 나는 신이 될 수 있겠지. 제우스처럼 높은 구름 위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겠지. 경제적 자유를 이루면 자격지심은 사라지겠지. 랩스타가 되면 모두의 존경을 받을 수 있겠지. 내 장례식이 끝난 후 천국에 가면 이 땅에서 흘린 눈물을 잊을 수 있겠지.
마가복음을 읽으며 내게 피어난 예수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 모든 눈물 속에 부활이 피어난다고. 참고 견디는 이유는 참고 견디기 위함이라고. 그러므로 모든 눈물을 오롯이 경험하라.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매일 최선을 다해 죽으라. 잠들지 않으면 새 하루를 맞이할 수 없듯 매 순간 죽지 않으면 다시 살 수 없다. 지금 겪는 죽음의 시간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유일한 시간이다. 죽음 속에서 부활이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