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 위의 음악가’를 다시 펴내며
작년 10월에 브런치북으로 발행했던 링 위의 음악가를 다시 쓰려한다. 그 이후로 너무 많은 이야기가 쌓였다. 너무 많은 관찰과 배움도 쌓였다. 쓰기를 미루다가 어느덧 2025년의 100일째를 향하고 있다. 미트 치듯이 부지런히 쓰리라 다짐한다.
링 위의 음악가라는 표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는 자격이 있는가 묻는다. 나는 스스로 음악가라고 부를 자격이 있나? 소리 음에 즐길 락이니 음을 가지고 이리저리 노는 사람이 음악가일 텐데. 나는 충분히 가지고 놀지 못한다. 연습량은 턱없이 부족하고 다른 사람의 음악을 충분히 깊이 듣고 있지 못하다. 그렇다면 나는 링 위에 설 자격은 있는가? 충분히 수련하고 있지 않다. 이 쪽도 연습량이 부족하긴 마찬가지다. 신체적인 능력치와 운동 센스가 부족한데 이를 채울 시간도 늘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링 위의 음악가라는 표현이 마음에 드는 이유는 이 말이 격투보다는 따뜻하고 음악보다는 뜨겁기 때문이다. 둘은 너무도 다르다. 승패가 없는 음악과 승패가 확실한 격투. 다른 새의 울음에 함께 우는 새의 뇌와 기세를 잡을 때 거침없이 물어뜯는 악어의 뇌. 둘을 좋아하고 몰입하는 사람들의 성향도 다르다. 음악인 사이에서 내가 듣는 말은 “개좋다”, “죽인다”, “뭉클하다“ 등이다. 반면 격투인 사이에서 내가 듣는 말은 ”(골로) 보내겠다“, ”(턱을) 돌리겠다“ 등이다. 이 쪽도 “죽인다”는 표현을 쓰지만 “음악 죽이네~”가 아닌, 진짜로 사람을 죽이겠다는 결의다. 시합 직전만 되면 도장 곳곳에서 죽인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듣는다.
너무도 다른 둘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수련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딱 내가 연습한 것보다 좀 더 못한다. 가끔은 많이 못한다. 그래서 수련에 끝은 있을 수 없다. 내가 멈춰야만 끝이 난다. 끝이 보이지 않는 여정이므로 잠시라도 게으르면 수련량이 탄로 난다. 주변에 격투와 음악을 둘 다 좋아하는 음악인이 둘셋 정도 떠오르는데, 한 명은 매일 덱 앞에서 디제잉을 샌드백 때리듯 수련하고 다른 한 명은 작업실에 박혀 트랙메이킹을 미트 치듯이 연습한다. 왜 그들이 연습에 몰입하는지 알겠다. 수련만이 진실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다운되었을 때 일어나는 느낌으로 힘겹게 다시 펜을 집는다. 심판의 카운트가 끝나고 다시 시합이 시작했다. 힘겨운 몸과 마음을 이끌고 나는 어디까지 쓸 수 있을까? 쓰고 또 쓰다가 운이 좋아 다운을 뺏어 승부를 원점으로 돌릴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