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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희 작가 May 04. 2023

돈 주고도 못(안) 사는 경험

3. 대견한 놈

2년 전쯤, 정확히는 2021년 늦여름. 아는 PD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기 대학교 선배가 드라마 팀에서 일을 하는데(*통화한 PD는 예능 PD이다.) 이번에 들어가게 된 드라마의 여자 주인공이 예능 작가라 실제 예능 작가를 취재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고, 마침 내가 딱 떠올라서 그러는데 도움을 줄 수 있겠냐는 전화였다. ‘오? 드라마 여자 주인공이 예능 작가?’ 흥미로웠다. 물론, 인터뷰 장소와 시간도 나에게 맞춰주겠다고 하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고 인터뷰를 수락한 가장 큰 이유는! 그간 드라마, 영화에서 다룬 예능 작가가 실제와는 많이 달랐기에 평소에 아쉬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흔쾌히 인터뷰를 수락했지만...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


막상 예능 작가를 여주인공으로 하려고 보니 재미가 없어서 직업 설정을 바꿨나 보다 하고 머릿속에서 잊혀 갈 때쯤, 드라마 제작 PD에게서 연락이 왔다. 2021년 12월이었다. 너무 늦게 연락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아직도 인터뷰할 생각이 있는지 의사를 확인하고, 그날 오후 인터뷰 질문지를 보내왔다.


2021년 12월, 드디어 연락이 왔다!


자칭(?) 드라마 광인 나는 질문지를 다운로드하면서 엔도르핀이 도는 기분이 들었다. “어쩜 너무 재밌을 것 같아!” 질문지는 무려 10페이지였다. 10페이지나 되는 질문들이 다 기억나지 않고 다운로드 기간이 만료되어 다시 열어볼 수 없지만 지금 기억나는 질문을 몇 가지 적어보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Q. 예능 작가는 무슨 일을 하나요? 보통 연예인이나 촬영 장소를 섭외하나요?

Q.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동안 작가들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나요? 출퇴근 시간은 언제인가요?

Q. 작가들이 촬영, 편집에도 참여하나요?

Q. 방송을 내보내기 전에 출연했던 연예인들에게 방송 내용을 확인받나요? 편집본을 요구하면 보여주나요?


쭉-쭉- 질문지를 읽으면서 떠오르는 생각은 딱 한 가지. ’아...! 아직 사람들은 예능 작가에 대해 잘 모르는 구나‘


그래서 더욱, 이 드라마의 여자 주인공이 예능 작가였으면 좋겠고 이 드라마가 흥행에 성공해서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에너지가 솟아났다. 야무지게 인터뷰를 준비하리라는 일념으로 최대한 많은 작가들의 다양한 경험담을 들려주고자 친한 작가들에게 연락해서 에피소드를 쌓았다. 여러 경험담이 필요했던 질문은 아주 단순하고 뻔했다. <일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뭔가요?> 


며칠의 시간 동안 작가들에게 경험담을 들으며, ‘나도 그런 적이 있다’ 공감하고, ‘진짜? 너 진짜 민망했겠다’며 서로 위로했지만 결론은 “우리 무슨 에피소드 화수분이야? 뭐 그렇게 기억에 남는 게 많은 거야!“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몰라 대부분 퇴근 시간이 일정하지 않고, 특히 프로그램 론칭 전 기획 단계 때는 뭐 하나 제대로 결정짓지 못하고 더 좋은 아이디어가 없을까 회의만 주구장창 하기 때문에 저녁 약속을 취소하는 건 기본이거니와 어떤 작가는 <소개팅 남과 만날 약속을 할 때마다 사건 사고가 터져서 4번이나 약속을 미루다가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지독한 장문의 카톡을 받고 회의하다가 그 자리에서 오열>한 이야기. <남자친구랑 뮤지컬 데이트 하던 중, 평소에는 내 연락처를 저장했나 싶을 정도로 전화 한 번 안 하던 메인 언니에게 전화가 걸려와 전화받으러 나갔다가 그대로 재입장하지 못하고 로비에서 남자친구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던 (이 친구는 그날 이후로 비슷한 짓(?)을 한 번 더 하고 차였다고 했다.) 이야기. 실제로 프로그램을 시작하면 단체 카톡방이 못해도 6~7개가 만들어지는데 (많을 때는 뭐 10개 이상... 어우 두야) <언제, 어느 단톡방이 울릴지 몰라 그토록 좋아하던 목욕탕을 프로그램하는 도중에는 절대 가지 못한다는 찝찝한(?)> 이야기. <너무 일이 많아 며칠째 집에 갈 시간도 없고, 빨래할 시간은 더 없어서 쿠팡으로 고무줄 바지와 일회용 속옷을 회사로 배송시킨 적 있다>는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이야기 등 글로 적을 수 없는 이야기가 많아서 아쉽지만, 소위 웃. 픈 이야기가 가득했다.


이러한 다양한 이야기에 드라마 작가님과 제작 PD님은 공감, 위로를 아끼지 않으셨고 후한 리액션이 즐거워서 무려 5시간 40분 동안 떠들고 인터뷰(라 쓰고, 독백이라 봐도 무방)를 마쳤다. 광대가 된 기분이었지만 뿌듯했다. 굉장히 보람찬 하루였다.


오전 11시 40분 쯤 만나서 오후 5시 30분에 헤어졌다.


그다음 해인 2022년에 드라마는 방영했으나, 일이 너무 바빠서 챙겨 보진 못했는데 지금 찾아보니 여자 주인공의 직업이 바뀌었네...! (제 얘기에 박장대소하셨으면서... 히잉) 직업을 바꿔서였을까... 꽤 흥행에 성공했군. 고생하셨어요!


어쨌거나 돈 주고도 못 사는 경험을 많이 했고, 지금도 하고 있고, 앞으로 또 어떤 신선한 경험을 하게 될지, 정말 너. 무. 기. 대. 된. 다. 역시 작가는 최고의 직업이야!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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