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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격하는지혜 May 10. 2020

진가(眞價)가 모든 편견과 오만을 이긴다

"I had flipped completely", 영화 '플립'


영화 '플립' 스틸컷1


감독 로브 라이너의 영화 ‘플립(Flipped)’은 사랑에 빠진 눈빛을 하기에도, 언짢은 표정을 짓기에도 너무 어린 소녀 ‘줄리’와 소년 ‘브라이스’의 첫 만남으로 시작한다. 나는 한 눈에 줄리의 짝사랑이 그 길고 긴, 지난한 역사를 시작하려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린 소년 ‘브라이스’는 이 조건 없는 관심과 사랑을 성가셔 할 테고. 이렇게 둘 사이를 일렁이는, 세상에 처음 얼굴을 들이민 감정의 움직임이 낯익고 또 달가워, 나는 기꺼이 그들의 세계에 일원이 되었다.


브라이스가 줄리의 애정을 받는 건 굉장한 영광이었다. 줄리는 아무 대상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 아이인 까닭이다. 마을 사람들은 거추장스럽다며 베어 버렸어도 그 위에 오르면 풍경 전체를 조망하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던 플라타너스 나무를 사랑했고, 집 앞 뜰 하나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 무시를 받았어도 정신지체장애가 있는 남동생을 살뜰히 보살피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을 알아보고 고된 삶에 선뜻 동참한 어머니를 사랑했다. 브라이스는 왜 좋아했냐면, 꼬마의 눈빛이 그윽하면 얼마나 그윽하다고 그 눈빛에 반했단다.


영화 '플립' 스틸컷2


즉, 그녀의 취향은 여느 아이와 다르게 상당히 고상했는데 여느 아이, 여느 사람과 다르지 않은 브라이스는, 안타깝게도 줄리의 진가를 알아볼만한 수준이 아직 못 되었다. 그리고 줄리가 알아본 자신의 진가도. 나무 위에서 볼 줄 아는 줄리와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게 다인 브라이스의 시선이 갖춘 수준이 같을 리 없고 이미 선택을 받았다는 교만함도 한 몫 했다. 여기에 줄리를 ‘괴짜’로 보는 아버지나 친구의 편견 어린 시선까지 더해져 자신을 바라보는 줄리의 사랑 가득한 눈빛이 성가시기 이를 데 없게 된 것이다.


대부분의 우리는 사람 특유의 어리석음을 타고난 탓에 곁에 있는 것이 더 이상 있지 않을 때야 비로소 그것이 보물이었음을 깨닫는다. 브라이스는 자신이 저지른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줄리가 영원할 것만 같은 사랑을 거두고 나서자, 교만과 편견에 가려져 있던 제 속마음을 발견했다. 이미 그는 줄리의 진짜 모습을 알고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오색찬란한’ 줄리를 도대체 누가 거부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여온 게 바로 자신이었다.


영화 '플립' 스틸컷3


“I had flipped completely(나는 완전히 변했다).” 이제 상황은 변했다. 아니, 전복되었다고 해야겠다. 이제 브라이스가 줄리에게 자신의 진가를 증명하여 단단히 닫힌 줄리의 마음을 다시 열어야 한다. 지난 모든 일들, 미처 알아보지 못해 벌어진 모든 상황들을 용서받아야 한다. 고민하고 또 고민하던 브라이스는 줄리가 사랑했으나 지금은 사라져버린, 돌연변이 가지들이 뒤엉켜 사람들은 흉하다 여겼지만 줄리에게만큼은 마을의 보물이었던 플라타너스 나무를 떠올린다. 그리고 영화에서 가장 멋진 장면, 나에게 ‘플립‘을 단순히 어느 소녀와 소년의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넘어 인생의 명화로 인식하게 한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낸다.


줄리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내다보면 소녀의 집 앞 뜰의 땅을 파고 있는 브라이스가 있다. 소녀는 당황스럽고 화도 좀 난다. 그런 소녀를 의식했는지 이내 사라지는 소년, 곧 다시 나타나는데 손엔 소녀가 줄기차게 사랑했으나 잃어야 했던 플라타너스를 닮은 묘목이 하나 들려 있다. 소녀의 얼굴은 감격으로 일렁이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밖으로 나가 소년과 함께 그 작은 나무를 심기 시작한다. 자신의 집 앞 뜰에 제대로 뿌리를 내리도록 아주 단단하게.


영화 '플립' 스틸컷4


사람들에 의해 베어진 플라타너스는 브라이스에게 냉대를 당한 줄리이기도 했다. 그리고 브라이스의 아버지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았던 줄리의 가족이기도 했다. 브라이스가 다른 것도 아닌 플라타너스 묘목을 가져왔다는 맥락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이제야 정말 줄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바라보게 되었고, 더 이해하고 바라보고 싶다는 거니까. 줄리에게 있어 이보다 최상의 사과 혹은 고백이 있을 수 있을까.


함께 무릎을 꿇고 나무를 심으며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처럼, 아니,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마주한 건 이번이 처음일 테니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 맞겠다, 끝도 없는 대화를 시작한 둘의 모습은 나에게 말할 수 없는 감동과 격려가 되었다. 두 아이가 모든 편견과 오만을 기어코 넘고 만들어낸 그 멋들어진 장면이, 아무리 강력한 오만과 편견이라도 그 사람의 진가를 가릴 수 없을뿐더러 결국 전복될 수밖에 없다는 무언의 믿음을 건넨 까닭이다.


영화 '플립' 스틸컷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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