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은 맞닥뜨려야 할 우리 모두의 '낭만닥터 김사부'
‘낭만’, 사전적 의미로는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분위기다. 이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라는 부분 때문에 우리는 으레 ‘낭만’이란 단어를 들을 때면 현실감각 없고 물색도 없고 실(實)도 없는, 손에 잡히지도 없고 게다가 철까지 지난 뜬구름을 떠올리곤 한다. 틀린 소리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른다. 우리의 근본적인 물음, 그러니까 사는 이유와 목적에 대한 답은 대부분 저 물색 없고 실(實) 없는, 철지난 뜬구름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매회 명대사를 낳는 것으로 유명했던 SBS ‘낭만닥터 김사부2’(이하 ‘낭만닥터2’, 연출 유인식⋅이길복, 극본 강은경)의 마지막회는 유독 더 특별했다.
본원으로의 복귀 요청을 받고 상담 차 찾아온 차은재(김성경)에게 건네는 김사부(한석규)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사를 내뱉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무엇이었으니까. 긴데다 무게감까지 갖춘 대사를 한 번의 어그러짐 없이 듣는 이의 귀에 쏙 들어오게 읊는 배우도, 대사에 참 말끔하게도 담긴 드라마의 주제의식도 대단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만 되는 일이고 그 최전선에서 느끼는 책임의 무게 때문에 고통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매일같이 네가 살려내는 환자들 보면서 의사로서의 자부심만큼은 확실하게 챙길 수 있을거야. 하지만 본원으로 돌아간다면, 여기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에서 경력 쌓게 되겠지. (중략) 어느 쪽이 더 의사다운가, 어느 쪽이 더 나은 인생인가, 그래서 가치있는 인생인가 하고 나에게 묻는 거라면 나는 판단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해. 인생이라는 거, 그거는 남과 비교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선택의 문제거든”
김사부의 말이 묵직한 힘을 지니는 것은 단순히 구구절절 옳아서만은 아니다. 실력 있는 의사로서 얻는 명성과 풍요보다는 생명을 살려내는 의사로서의 자부심이, 그가 자신의 삶을 두고 보았을 때 얻길 원하는 가치여서 그렇게 살길 선택했다.
그런데 이게 보통의 사람들이 일컫는 현실과 대치되는, 낭만이라 부르는 것이 표방하는 방향이었고, 그는 자연스레 ‘낭만닥터’가 되어 있었다. 즉, 현실에 두 발을 디디고 있으나 매이지 않았던, 시선은 항상 이상을 향한 채 살아온 그의 실제 삶이 그의 말에 힘을 싣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김사부를 제대로 경험한 이들은 그 낭만에 물들거나 혹은 본체를 변화시키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다. 왜냐면 사실은, 이미 마음이 딱딱하게 굳는 과정이 진행된 몇몇을 제외하고는, 웬만한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존재하는 걸 알면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그러면서도 누군가는 꼭 지켜줬으면 하는 아름다운 가치들’,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살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한다고 세뇌 당해온 것들, ‘낭만'을 향한 그리움이 잔존해 있는 까닭이다.
이 가치를 어떤 타협도 없이 지키는 사람이 있다니, 게다가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은, 설사 적이라 해도 무시하지 않으며 버리지도 어떤 목적을 위해 이용하지도 않는다. 괴짜처럼 굴지만 본연의 따뜻한 관심과 배려를 바탕으로, 상대방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본모습을 존재한다고 믿어주고, 자라고 여물도록 아껴주며 성장하도록 인정해준다. 세상이 하자라고 말하는 것을 상처라고 바꿔 말하며, 그를 극복해나가도록 이끌어준다.
이래서 많은 이들이 김사부를 좋아하고 또 싫어한다. 싫은 이유야 가지가지겠지만, 공통적으로는 김사부 앞에 서면 어쩔 수 없다며 현실에 끌려다녀온 자신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부끄럽고 어떤 패배감마저 들어서, 정확히 말하면 그가 꺼려지는 것이다. 이의 반사작용일까. 젖 먹던 힘을 다해 자신이 해온 노력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는, 김사부가 틀린 것이라는 증명을 하기 위해 애를 쓰기 시작한다. 애석하게도 곧 깨닫고 물들게 될 테지만.
이유도 모른 채 현실에 매여, 정작 묻고 짚어내야 할 질문은 뒷전으로 미루고 살아온 것, 이것이 현실적이고 성숙한 어른의 삶인 마냥 살아온 지난날이야말로 뜬구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우리가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에 대한 질문을 포기하지 마. 그 질문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의 낭만도 끝이 나는 거다.”
낭만, 결국 현실에 매이지 않는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작업일 수도 있겠다. 현실의 힘이 강해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존중해 주기보다 포기와 타협만이 최선책이 되고 있는 오늘, 김사부는 우리에게도 너무도 절실히 맞닥뜨리고픈 사부(師傅)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