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의 어벤져스 1세대를 추억하며
마블의 매력을 꼽자면 잘 만들어진 캐릭터, 탄탄한 세계관 등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가장 강력한 요인은 아무래도 히어로관이다. 히어로는 어떻게 탄생하며, 히어로란 존재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히어로를 히어로답게 만드는 건 무엇인가. 이 끊임없는 질문들과 그에 대한 답은, 마블의 히어로물들을 단순한 흥밋거리 이상으로 만드는 원동력이다.
마블의 히어로관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건 ‘쉴드’가 파괴(‘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에 해당)되면서부터다. 인류를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겠단 목적으로 창설된 기구 쉴드가 오히려 위협적인 대상으로 변질되자 캡틴 아메리카(이하 ‘캡틴’)가 파괴해버린 것이다. 이 맥락을 통해 우리는 보통의 범주를 넘어서는 힘이 주어진다는 건 그에 합당한 보통 이상의 도덕적 책임감과 선한 영향력이 요구되며 세계의 고통을 숙명처럼 지고 가야 하는 일임을 깨닫는다. 즉, 히어로가 멋있기만 한 직업이 아니란 의미다.
동일한 맥락에서 ‘캡틴 아메리카: 시빌워’에서 캡틴과 아이언맨(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이 갈등을 일으키는 장면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윈터 솔져(세바스탄 스탠)가 자신의 부모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이언맨은 그와 그를 감싸는 캡틴과 결투를 벌인다. 치열한 공방 끝에 캡틴의 방패가 아이언맨의 슈트가 가진 힘의 근본 아크원자로를 망가뜨리며 결투는 마무리되고, 캡틴은 방패(아이언맨의 아버지가 만든 것)를 놓고 떠난다.
방패에 의해 아이언맨의 슈트가 망가지고 캡틴이 방패를 놓고 떠난다, 이것이 반영하는 마블의 히어로관은 다음과 같다. 히어로의 정체성은 초능력이나 괴력에 있지 않고, 개인의 이익이나 복수를 위한 것도 아니며, 인류 혹은 자신의 영향력 안에 있는 공동체를 지키는 것에 더 큰 간절함을 보이는 마음, 그 열망 높은 책임감에 있다는 것, 여기서 방패와 슈트로 대표되는 히어로가 지닌 초인적인 힘은 수단으로서의 구실만 할 따름이란 것. 만약 전자(책임감)가 충족되지 못한 후자(초인적인 힘)는 없느니만 못하다는 것까지.
마블은 ‘스파이더맨: 홈커밍’과 ‘토르: 라그나로크’를 통해 자신이 그리는 히어로의 모습을 더욱 구체화한다. ‘스파이더맨: 홈커밍’에서 아이언맨은 아직 히어로 입문 중인 천둥벌거숭이 스파이더맨(톰 홀랜드)을 제대로 양육하기 위해 그에게 준 슈트를 압수해간다. ‘슈트 없인 아무 것도 아니면 더욱 가져선 안 돼’라는 말과 함께. 상당히 흥미로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알다시피 본인의 히어로성(性)이 ‘슈트빨’일 수도 있단 점을 매순간 인식 중인지라 슈트 없이 아무 것도 아니란 말에 가장 민감하게 굴던 인물이 바로, 아이언맨 아니었던가.
생체 실험이나 고된 훈련, 아니면 신적 존재 등등의 이유를 통해 보통 이상의 힘을 갖게 된 캡틴을 비롯한 다른 히어로들과 달리, 아이언맨은 뛰어난 두뇌와 넘치는 부, 첨단과학기술이 만나 만들어진 슈트에 의해 히어로가 된 인물이다. 그렇기에 아이언맨의 히어로성(性)은 슈트를 포함하고 있으나, 슈트 자체가 토니 스타크(아이언맨)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생각하면 다른 히어로들과 다르게 볼 것은 또 없다.
하지만 아이언맨이 가진, 어쩌면 애매할 수도 있는 히어로성은 마블의 히어로관을 더욱 선명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아이언맨이 슈트에 보이는 집착과 고민을 통해 혹은 아이언맨이 스스로에게나 스파이더맨에게 던지는 경각심을 통해, 우리는 히어로란 슈트와 무기가 없어도, 초인적인 힘을 제거 당해도 히어로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되새기게 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죽고 묠니르(망치 모양의 무기)는 산산조각 났다. ‘토르: 라그나로크’의 이야기다. 그러나 묠니르가 없다고 토르(크리스 햄스워스)가 천둥의 신 토르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니다. 작품 속에 놓인 고난들을 통해 토르는 묠니르가 없어도 힘을 발휘하는, 진짜 천둥의 신 토르로 거듭난다. 이처럼 매력적인 히어로관이라니. 마블의 히어로물이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사랑받았던, 혹은 여전히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