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빌레라', 생의 시간을 좀 더 견딘 이가 건네는 최고의 가르침
일흔의 할아버지가 발레를 하고 싶다면 무슨 생각부터 먼저 들까. tvN ‘나빌레라’ 속 덕출(박인환)의 이웃 주민들은 다 늙은 나이에 웬 춤바람이나며, 주책이고 꼴불견이라 쑥덕거렸지만, 어쩌면 이보다 현실적인, 가장 보통의 반응은 아마도, 그의 발레에 대한 간절함을 되돌리는 게 불가능한 시간을 되돌려보겠다 애쓰는 행위로 인식하며 내뱉는 안쓰러움 가득한 동정일 테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덕출의 발레선생으로 간택받은 스물 셋의 채록(송강)에겐 그러한 동정조차 할 여유가 없었으니, 나이 일흔과 비할 바는 아니지만 시작점이 늦은 건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렸을 때부터 시작하는 여타의 발레리노들과 달리, 축구감독인 아버지 아래에서 재능도 흥미도 없는 축구를 내내 하며 십대 시절을 다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발레와 맞닥뜨렸으니까.
덕출의 순수한 열망이 슬럼프에 빠진 제자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단 생각으로 밀어부친 스승 기승주(김태훈)가 아니었다면, 채록에겐 일면식도 없던 할아버지의 말도 안되는 제안을 받아들일 여유나 이유가 전혀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기승주의 눈썰미는 정확했다. 뛰어난 발레리노로 무대에 오르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독불장군처럼 홀로 연습하고 춤을 추던 채록이, 덕출과 시간을 보내며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한 것.
“죽기 전에 나도 한 번은, 날아오르고 싶어서.”
서로의 나이가 갖는 간극이 무색할 만큼 두 사람은 꼭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무대 위를 날아오르는 발레리노의 모습에 홀딱 반해 무용수를 꿈꾸기 시작했다는 것에서부터 현실이 건네는 반발에 끝끝내 수긍하지 않고 있다는 것까지 덕출과 채록은, 닮은꼴이었다. 덕출의 세상이나 채록의 세상이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꿈 따위 사치이니 그저 놓인 현실에 수긍하며 살아가라는 윽박은 동일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그 엄혹함의 방향이 달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을 가능하게 할 통로가 있었고 없었고,정도라 할까. 순간의 실패와 성공은 차마 염두에 둘 수 없을 만큼 삶의 끝자락에 놓인 덕출의 발레가, 아직은 생이 창창하여 순간의 현실에 쉽게 함몰되곤 하는 채록의 가슴을 결국 울리고 움직이게 하고 만 이유다.
“채록아, 내가 살아보니까 삶은 딱 한 번이더라, 두 번은 아니야.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해. 할 수 있을 때 망설이지 않으려고, 끝까지 한 번 해보려고.”
그리하여 보통의 발레리노들보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만큼 한층 절박하게 준비했던 콩쿠르를 예기치 못한 다리 부상으로 포기하게 되었을 때에도 채록은, 약간의 애꿎은 오기를 부리기도 했으나 좌절하지 않고 곧, 자신이 좋아하는 발레를 오래 좋아하고 즐기는 방향으로 선택할 수 있었다.
가슴을 설레게 하는 꿈은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설레는 강도는 더해지는데 현실과 이상을, 일상과 꿈을 나누는 것을 당연히 여기며 살아가다 어느 순간 문득, 돌아오지 않는 시간의 무게를 깨달아 아는 까닭이다. 덕출에게 발레는 소멸의 시간 앞에서 삶을 잃지 않기 위해 남아있는 모든 용기를 끌어모아 다시 거머쥔, 무엇과도 바꾸지 못할 생의 설렘이었다.
삶의 한 가운데에서는 이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지 알지 못한다. 각각의 현실이 마치 충족해야 할 당연한 것인 듯 생의 여러 요건들을 우리의 코앞까지 들이밀 때에는 더더욱. 그래서 덕출의 존재와 그가 온 힘을 다해 맞닥뜨리는 아름다운 도전이 채록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깊은 감동을 안기는 것이고. 생의 시간을 좀 더 견뎌낸 이가 뒤따라 오는 이들에게 건넬 수 있는 최고의 가르침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