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부여
왜 아저씨들은 뭔지 모르겠는 주장들을 심각하게 늘어놓는 방송을 그렇게 좋아할까? 왜 어른들은 노는걸 안 좋아할까? 장난감은? 놀이공원은? 친구들은? 왜 쓰디쓴 술을 마시며 숨 막히게 불쾌한 담배라는 것을 피울까? 어렸을 때 자주 궁금해했다. 나이가 들어서 틴에이저가 됐을 때는, 경제활동과 가족구성의 의무를 알았을 때는, 인생이 스캠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고생이라는 고생은 피할 수 없다는, 그러다 병들어 죽는 게 인생이다. 그래도 하고 싶은 건 최대한 하면서 살자. 그 생각이 정점에 달했을 때가 군대 훈련소 입소 때였던 것 같다. 1999년이었다. 군기를 잡는 대단히 뻔한 방법이겠지만, 좀 껄렁한 놈 하나 봐뒀다 처음 훈련소 건물에 들어가려 줄을 설 때, 헌병인지 기간병인지가 그놈을 두들겨 팬다. 그 친구 가방 집어던지면서. 다른 애들은 자연스럽게 군기인지 공포인지 절망인지 슬픔인지가 자리 잡으면서 훈련소 생활이 시작되는 거였다. 태어나서 사는 건 죄는구나. 죽지 못해 사는 것이구나. 안 태어나게 하는 게 낫겠구나.
그럼 산다는 게 뭘까? 적어도 어렸을 적에는 하고 싶은 게 확실히 있었다. 철인 28호? Z건담? 얼음난로? 에버랜드? 이런 것들. 반드시 재미난 것이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꿈이다 꿈. 아빠가 퇴근할 때 양복 재킷 안주머니에서 풍겨 나오는 은단 냄새. 가끔 지갑에서 꺼내서 보여주던 일억 원정 수표. 엄마가 데려간 대학로 어딘가 유리 천장에서 햇빛이 스며들어오는 카페에서 마신 파인애플 주스 (아마도 중학생 때 정도?), 좋아하던 대학교 캠퍼스에서 어슬렁거리던 고등학생 시절. 무슨 이유에서인지 신약성서를 읽으면서 예수님이 불쌍하다고 울적해진 적도 있었다. 대하소설 단! 소설 정감록, 금강경 강해, 파스칼의 팡세 등등 왜 재밌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엿튼 흥미로웠다. 뭔가 인생의 비밀을 여는 돌파구 아닐까. 락밴드를 시작했다. 뭔가 본조비, 레드 제플린 비슷한 소리가 난다는 경이로움. 4명의 합심과 그 몰입감. 그래 자작곡도 만들어보자. 혹시 몰라 락스타가 멀지 않았을 수도. 이크 너무너무너무 창피하다. 막상 녹음하고 난 후 들어보니.
어느 순간부터 꿈이 야망이 되고 숫자가 되고 결과가 나와야 하는 무엇이 되었다. 누군가에게 보이고 어느 포지션을 꿰차고 뭔가를 만들어내고 세상을 뒤흔들고 그 보상을 받는다. 그게 나다. 내가 누군지는 내 이력서가 말해준다. 내가 뭘 좋아하던 뭘 생각하던 하등 중요치 않다. 그래. 내로라하는 대학에 합격하자. 뭔가가 되겠지. 병역특례를 가자. 뭔가가 되겠지. 유학을 가자. 뭔가가 되겠지. 박사가 되자. 뭔가가 되겠지. CFA를 따자. 뭔가가 되겠지. 미국에 정착하자. 뭔가가 되겠지. 금융권으로 가자. 뭔가가 되겠지. 큰 집을 사자. 편하게 살 수 있겠지. 재정을 튼튼하게 하자. 돈 걱정이 줄어들겠지. 노후 준비를 철저히 하자. 늙어서 고생하지 말고. 아이들을 행복하게 하자. 애들이 나처럼 생각하지 않게. 그래서? 내 인생은 숫자가 되었다. 소화불량에 걸린. 잔뇨감 가득한. 아침저녁으로 기진맥진한. 매일매일 레이오프 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한. 일요일 저녁만 되면 우울과 불안이 가득한. 잠깐잠깐 내 딜리버러블이 잘 어프리시에이티드 될 때 반짝 드는 잡 세큐리티 확보의 안도감까지. 그러나 이게 언제까지 갈까? 다음 액션 아이템으로.
피곤하다. 자도 자도. 외려 일할 때 덜 피곤하지만 그럼 피로가 쌓인다. 쉰 살이 되었다. 뭐 되고 싶은 거 그런 거 없다. 30대처럼 애써 본심을 숨기면서, 아니면 냉소가 가득한 꿈도 없고 삶도 없고 등등 그런 넋두리가 아닐 거다. 모 아니면 도 시기는 이미 좀 많이 전에 지나갔다. 핵심은, 하고 싶은 것, 의미 있는 것, 되고 싶은 것, 이 모두가 사라졌다. 퇴근길에 펜 스테이션까지 걸어가며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들. 짜증 난다. 무슨 사연이던 비즈니스이든 간에 떠밀려 간다. 해야 하는 일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그게 무슨 의미란 말인가? 여기에 친구를 마주친다면 기쁠까? 아니 여기가 을지로였다면 좀 다를까? 왜 C-suite급 사람들의 온갖 표정에 짜증이 묻어나 있는지 퍼뜩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난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는가? 이 짓을 왜, 언제까지 해야 하는가? 아니 그럼 뭘 할 건데? 주변 지인들은 난리도 아닌데? 사업은 다들 시들시들해가고, 애들은 말썽만 피우고, 부모님은 오늘내일하시거나 하나둘씩 세상 떠나신다. 곧 네 차례다. 고독사 유튜브를 보자. 네 미래일 수 있다. 그게 어때서? 죽고 난 담에야 어떻게 죽던 뭔 상관인가? 죽기 직전까지가 문제지. 페트병 소주 퍼마시다 엎어져서 가는 게 그렇게 고통스러울까? 병실에서 몇 달 내내 연명치료 진통제에 절여져서 죽어가는 거랑 뭐가 크게 다른가?
전 인생을 바쳐 만들어 놓은 나와 내 가족의 동물원에 입주한다. 더 잘 만들었을수록 그 안에선 더 안전하고 더 걱정 없고 더 고통도 적다. 에어 컨디션드 된 나의 비공개 동물원. 더 많이 투자할수록 더 많은 리소스가 투입되어 나를 더 편하게 한다. 나의 노후, 나의 미래, 저세상 가기 전 대기실이라 불러도 좋겠지. 얼마나 가치 있는 인생인가? 내 인생은 내 유형무형 자산의 미래 캐시플로우의 현재 가치이다. 디스카운트 레이트 리스크는 잘 관리되고 있다. 현재의 가정으로서는 그렇다. 물론, 내 시간과 에너지를 바쳐서 동물원을 만드는 게 내 인생의 목표였다는 걸 지금 깨닫는다는 게 어처구니없긴 하지만. 그래서, 결국 내가 하고 싶은 것, 나에게 의미 있는 것, 내가 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다시 철인 28호로 돌아갈까? 락밴드를 다시 시작해 볼까? 이왕 이리된 거 세상을 정복해 볼까? 잔뇨감 때문에 힘들듯 하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답을 찾아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