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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고르 Jan 21. 2022

네팔 아이들 발에선 10년 묵은 된장 썩은 내가 난다.

네팔 해외봉사 경험기


교육과 관련된 지식은 아무것도 없어서 아이들에게 뭘 가르쳐야 할지 앞이 막막했다. 네팔 해외봉사에서 내가 맡은 임무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정규 선생님은 아니었고 내 학창 시절 일주일에 한 번씩 반에 와서 재밌게 수업했던 레크리에이션 강사 같은 느낌이었다. 이런 어중이떠중이 겉도는 선생님 신분일지라도 난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람이고 싶었다.


당장에 내가 할 수 있는 수업들을 떠올렸다. 난 어느 정도의 영어회화가 가능했고 한국에선 버스킹을 했다. 그리고 체육수업은 관련된 지식이 없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들에게 공하나 던져놓고 놀라고 하며 본인은 옆에서 다른 샘이랑 테니스를 치던 초등학교 체육 선생님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아이들에게 영어, 음악, 체육, 미술 선생님이 되었다.

아이들은 굉장히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학교 건물은 조악한 컨테이너 형태였고 책상과 탁자는 길바닥에 버려져있어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을 만큼 낡아있었다. 1~6학년까지 전체 학생 수를 합쳐도 60명을 넘지 않았다. 선생님들의 전문성도 문제였다. 치열한 경쟁을 거쳐 임용고시를 합격한 사람만이 교사가 될 수 있는 한국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여기선 선생님이 될 수 있다. 이곳에도 과학, 수학, 국어 등의 과목들이 존재했으나 교과서는 영어로 돼있었다. 네팔어로 된 책이 나오지 않았을 만큼 네팔의 교육시스템이 열악하다는 뜻이다.


내가 수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난 스타강사가 됐다. 학창 시절 내가 경험한 대로 스피커, 노트북, 소형 빔프로젝터를 통해 영상 자료를 사용했고 이런 비싼 기기들을 가지고 있을 리 없는 다른 선생님들과 차별적인 선생님이 됐다. 거기다 난 예체능을 가르쳤으므로 더 인기가 있었다. 다른 수업 시간엔 졸다가도 체육시간엔 눈이 반짝거리며 수업에 임하던 나의 과거와 같은 현상이다. 

내가 수업했던 학교는 두 곳이었다. 그중 한 곳은 산 중턱에 있었다. 통근을 하려면 에너지바와 물을 챙기고 등산을 해야 했으며 비가 오면 신발이 진흙투성이가 됐다. 30여 분의 등산 끝에 학교가 보이기 시작하면 내가 오기를 학수고대하던 아이들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 학교 학생들은 특히나 더 순수해 보였다. 수업을 시작하려 노트북을 꺼낼 때면 마치 이런 기계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듯 왕성한 호기심을 보였다.


재밌는 수업을 하는 외국인 선생님이었으니 아이들은 나를 좋아했다. 내가 들고 온 가방 속에선 평생 접하지도 못했을 다양한 기기들이 있었을 테다. 말끔한 화이트보드가 아닌 흙으로 된 교실 벽이었지만 그곳에 빔을 쏴 영상을 보여줄 수 있었다. 아이들은 영상에 집중하지 않고 빔 주변을 맴돌며 도대체 영상이 어떻게 나올 수 있다며 궁금해했다. 그럴 때면 영상이 어떤 원리로 프로젝트에서 나올 수 있는지 네팔어로 설명할 수 없음에 아쉬웠다.

네팔 아이들은 한국 애들보다 외모상으론 더 귀여웠다. 같은 아시아 인종이지만 다들 이쁜 쌍꺼풀을 가지고 있었고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네팔 아이들은 특히 더 귀여운 인상을 가졌다고 네팔 친구들에게 얘기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본인들도 어렸을 적엔 이쁘고 귀여웠었다며 네팔인은 커가면서 얼굴이 변한다고 얘기했다. 얘길 듣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친구의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인 것 같았다.

아이들 발에선 된장 썩은 내가 났다. 네팔은 한국과는 위생관념이 전혀 달랐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온수도 나오지 않으니 추운 겨울엔 거의 씻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들은 나를 좋아했으니 스킨십도 잘했다. 학생들이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달려들려고 하면 일시적으로 숨을 참았다. 아이들에게 환대 받은 적은 내 일생에 한 번도 없었으므로 냄새 따위는 아무렴 괜찮았다.


내 마음속엔 커다란 짐이 하나 있다. 한국에 대한 향수와 지독한 외로움 때문에 한국으로 조기 귀국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시의 내 상태는 나 말곤 아무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한국행을 선택할 당시, 학교는 방학이어서 아이들에게 인사할 기회도 없었다. 아무도 모르게 한국으로 떠났으므로 아이들은 강력한 의문이 들었을 것이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통기타를 열정적으로 가르쳐주던 선생님이 증발해버렸기 때문이다.


책임감 없는 선생님이 된 것 같아 지금도 마음이 무겁다. 4년이 지난 지금, 아이들은 이제 중학생이 됐을 것이다. 내가 조금이나마 가르쳐준 기타 코드를 기억해 줄지 모르겠다. 음악에 대한 씨앗을 뿌려줬으니 그것을 잘 키워나가는 학생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 애들을 다시 볼 낯이 없지만 궁금하다. 잘 살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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