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는 학교에 없다
제3장 초등학교 교육에 대한 단상
2015년부터 교육과정이 바뀌면서 `창의 융합형` 인재를 길러내겠다는 모토를 내세웠지만 사실 이는 말 뿐이다. 물론 내가 30년 전 초등학교를 다녔던 때와는 분명히 다르다. 체벌도 없어졌고 다양한 교육을 하고자 노력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방과후 수업이 다양해졌고 1년에 20일간 자율적으로 외부 체험활동을 하고 출석으로 인정받게끔 하는 제도도 있다. 심지어 중학교 1학년은 자율학년제로 다양하게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주어진 틀 안에 만들어내는 찍어내기식 교육은 여전하다. `규칙, 규율`이란 이름으로 선생님마다 어떤 기준을 정하고 그것에 맞춰야만 올바른 학생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지인의 아이는 우유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는 우유 급식을 하겠다고 신청했다. 사실 한 반에서 대부분의 아이들이 우유 급식을 한다. 그것은 단순히 우유를 좋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부모 입장에선 아이에게 성장에 도움되는 우유를 꾸준히 마시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특히 우유를 싫어한다면 다른 아이들이 우유를 마시는 모습을 보고 따라서 잘 마시게 될 것이란 기대도 했을 것이다. 아이 반 선생님은 아침마다 특정한 시간에 우유를 다 마시도록 했다. 그런데 매번 아이가 우유를 꼴찌로 마셨던 모양이다. 그렇게 늦게 마신 아이는 교실 앞으로 나와 서서 우유를 끝까지 마시도록 했다. 선생님은 아이가 우유를 늦게 마신다고 지인에게 전화를 했다. 지인은 “아이가 우유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우유를 마시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며 아이의 특성을 설명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냉담했다. 우유를 마실지 말지에 대해 선택하도록 했고, 우유를 마시겠다고 선택했다면 정해진 시간 내에 마시고 끝내야 한다는 게 선생님 말씀의 요지였다. 그러면서 선생님은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지인은 할 수 없이 아이에게 우유를 빨리 마시라고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지인은 또 아침 일찍 선생님의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은 “아주 기쁜 소식이 있어요. 아이가 오늘은 우유를 1등으로 마셨어요. 그래서 박수를 크게 쳐 줬어요”라고 말했다. 그 놈의 우유가 뭔지...마치 아이들에게 우유 빨리 마시기 대회를 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선생님은 우유를 아침 시간에 의무적으로 마시고 치우기로 법칙을 정했고 그것은 선생님이 이끄는 반의 규칙이 된다. 이를 어긴 아이는 규칙을 지키지 않은 아이다.
당연히 이러한 기준은 선생님마다 다르다. 선생님이 아이의 개별 특성을 고려해 맞춰주지 않는다. 아이들이 선생님을 맞춰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한테 이런 기준이 절대 기준이 아니라고 설명하기는 더 어렵다. 아이에게 “엄마는 굳이 선생님 말씀을 듣지 않아도 될 것 같아”라고 말하는 부모는 드물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아이는 선생님과 엄마 사이에서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엄마는 굳이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고 선생님은 꼭 지켜야 한다고 하고.. 아이에 대한 평가는 선생님이 하고..
학교에서 하는 교육과 사회에 나가서 어른으로서 가르쳐야 하는 교육 간의 괴리가 크다. 나는 학부모 상담에서 우리 아이에 대해 고자질을 많이 한다는 지적을 들었다. 초등학교 1학년들은 선생님이 감당을 못할 정도로 고자질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아이들이 보는 `친구를 잃어버리는 방법`이란 책에도 친구를 잃어버리는 방법 중 하나로 `고자질 하기`가 나온다. 고자질을 많이 하면 친구를 사귀기 어렵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아이가 고자질을 많이 할 경우 친구들이 아이를 싫어할까봐 걱정했다. 나도 그런 부분은 우려되기는 했다. 아직 어릴 때는 괜찮지만 아이가 이런 행동을 커서도 한다면 왕따 문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고자질과 관련된 책을 사서 아이에게 읽어주고 나 역시 읽어봤다. 그러나 명확히 어떤 행동이 고자질이고, 어떤 행동이 정직한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특히 사회적으로 잘못된 행동을 눈감아주는 것이 얼마나 문제가 되는지 여실히 드러나지 않았던가. 잘못된 행동인 줄 알면서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해 쇠고랑을 찬 장관들이 수두룩했다. 침묵하는 다수로 인해 사회 부조리는 한층 더 곪았을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친구가 잘못된 행동을 한 것을 선생님한테 얘기하지 말라고 교육을 하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나는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친구가 다치지 않은 이상 선생님한테 얘기하지 마. 그 친구도 그 행동이 잘못된 행동이라고 알지만 그냥 하는 거야. 계속 그렇게 친구의 잘못된 행동을 얘기하면 그 친구가 너를 싫어하게 될 수도 있어”라고 말했다. 아이는 나의 이런 말에 의아해했다. “왜? 그 친구가 그게 잘못된 행동인지 모를 수도 있잖아. 그러면 알려줘야지” 아이는 누군가 잘못된 행동을 한다면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선생님한테 얘기하는 것이 굉장히 올바르고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여겼던 듯 했다. 자기가 옳은 일을 했는데도 주변 어른들의 반응이 왜 이런 것인지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런 아이에게 “적당히 고자질 해야 돼”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아주 애매모호했다.
선생님에 따라서는 어떤 잘못을 한 아이가 있다면 그것을 이른 아이를 탓할 것인지, 실제 그 잘못을 한 아이를 탓할 것인지도 다르다. 잘못을 한 친구보다 그것을 이른 아이를 탓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이런 과정에서 아이는 혼란을 느낀다. 친구의 잘못된 행동을 `모른 척 눈감아 주기`의 적당한 선은 어디까지 일까. 그것을 이해심이라고 해야 할까. 이제 막 가치관을 형성해가는 출발선에 있는 아이이기 때문에 6살 이전의 아이를 대하듯이 이분법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측면이 상당하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다른 사람을 때리면 안 돼, 깨물면 안 돼” 등등의 선이 분명했다. 그러나 초등학교에 들어간 어린이는 유아기와는 좀 더 어려운 문제를 겪어나가게 된다. 사실 어른들조차 명확한 답을 내리기 어려운 문제들이 많다. 이런 상황에서 선생님과 부모의 가치관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이 역시 고민거리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