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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책으로 필사를 시작했습니다.

의무감으로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꾸준하게는 합니다

by 정희정

따라쓰기를 시작했습니다. 타이핑 필사, 노트북으로 책을 따라씁니다. 필사합니다. 사실 필사하고 싶다는 생각은 여러번 했습니다. 그런 기회들이 있었고 필사와 관련된 여러 책들도 보였습니다. 필사를 직접 책에다 적는 필사책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필로 펜으로 따라 적는 필사는 저에게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심한 다한증이 있거든요.


정말 심한 다한증이 있습니다. 학창 시절에도 함께 지냈던 인기 많은 친구와 손을 잡거나 할 때 내 손만 축축하게 땀이 나서 늘 창피했습니다. 나도 손을 꼭 잡고 친구와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싶고 다니고 싶은데 그게 안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움츠러들었고 성격도 소극적이 된 것 같습니다. 남들 앞에서 당당히 서서 말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었지요. 아마도 이런 저의 체질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핑계일 수도 있겠지만)

체육시간이나 미술 시간에도 어김없이 땀이 났습니다. 제일 중요한 교과목 시간, 노트에 필기하는 시간이 저에게는 늘 불편했습니다. 다한증은 땀이 많이 발생하는 증상 질환인데 어느 부위에 나느냐에 따라 얼굴, 손, 발, 가슴, 등 다한증으로 참 다양합니다. 제 여동생도 저보다 더 다한증이 심했습니다. 손 발에 집중적으로 났는데, 동생은 늘 손수건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손에 땀이 너무 나니 늘 축축하고 심한 경우 땀이 뚝뚝 떨어졌거든요.

언제 어디서 할 것 없이 다한증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노트에 필기할 때가 제일 불편했는데, 늘 저의 노트는 축축히 젖어 있어서 연필이나 펜으로 적을 때 젖은 노트가 찢어지기도 했습니다. 젖은 부분은 마르면서 매끈했던 종이 대신 꾸덕꾸덕한 종이로 바뀌고 말았지요. 그렇게 평생을 늘 다한증이란 녀석과 함께 다녔습니다.

글을 쓰던 습관이 있고 그래도 일을 하면서 노트북을 자주 접했기 때문에 저는 노트북이 편했습니다. 그래서 우연히 노트북으로 필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종이에 필사를 한다는 것은 나에게 그만 포기하시지. 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중간에 땀 때문이라도 필사를 중단할 이유를 찾았겠지요. 하지만 저는 이제 노트북으로 조금은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래도 노트북을 타이핑 하면서도 땀이 나지만, 그래도 종이에 묻어나는 것 보다는 나으니까요.


요즘처럼 책이 안 읽혀질때도 있습니다. 여전히 서점을 찾아가기를 좋아하고 도서관에서 이런 저런 책들을 구경하는 건 좋아하지만 쉽게 읽히지가 않았습니다. 그래도 꾸준히 시간이 될 때면 첫째 아이와 서점 나들이를 합니다. 그 날도 그랬습니다. 평일 낮시간 조용한 시간대에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김포공항 롯데몰에 갔습니다. 그 곳에 유일하게 큰 대형 서점이 있거든요. 늘 가는 곳이라 아이는 아이가 좋아하는 책 코너로 향하고 저는 제가 늘 기웃거리는 책 코너로 향했습니다. 서점에는 항상 사고 싶은 책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살 때는 굉장히 신중해집니다. 한 권 두 권을 찬찬히 살펴봅니다. 페이지를 넘겨봅니다.

보라색 빛깔의 책이 눈에 들어옵니다. 좋은 책이라도, 정보와 지식이 가득한 책이라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 날도 있습니다. 가끔은 쉬어가고 싶고 여백이 많은, 쉬운 책이 좋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날은 그 책을 집어들었습니다. 단순한 제목에 가벼운 책이었지만 한 줄 한줄 읽어내려갈 때 마음을 톡톡 울려주는 깊이가 있는 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책을 선택했습니다. 늘 주문하는 카페라떼 한 잔과 함께 말이지요.

왜 늘 필사를 하고 싶었던 걸까. 나는 늘 필사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왜? 도대체 왜? 필사가 좋다고 하니까? 그냥 그날은 적고 싶었습니다. 무언가 몰두할 것이 필요했습니다. 빡빡이 적혀있는 책보다는 술술 읽히는 가벼운 그 책이 좋았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남는 것이 있었습니다. 왠지 한 번 읽고 말기에는 아까운 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작했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쉬운 책으로 시작했습니다. 타이핑 쳐가며 적어야 하는데 굳이 어려운 책일 필요는 없습니다. 글자가 적은 책일수록 좋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요. 그리고 궁금했습니다. 사실 이게 가장 큰 이유겠지요. 다른 작가의 책은 원고의 양이 얼마나 될까? 평상시에 늘 궁금했거든요. 이 책의 작가는 사업 부도 후 재기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고, <다시, 일어서다>란 제목처럼 다시 시작하면서 글도 쓰고 전업작가로 활동하면서 다른 사람의 인생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었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 전업 작가. 원고의 한 꼭지당 어느 정도의 양을 써야 할까? 이 책은 한 꼭의 분량이 얼마나 될까? 한번 써보자.


한 꼭지를 골라 제목을 쓰고 따라쓰기 시작했습니다. 한번 눈으로 읽을 때는 그저 훑어보던 내용들이 타이핑을 쳐가며 따라쓰니 조금더 마음에 진하게 여운을 남깁니다. 처음에는 서툴렀습니다. 빨리 타이핑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닌데 자꾸 오타가 났습니다. 노트북으로 필사를 하니 그런가봅니다. 펜으로 연필로 노트에 진득하게 적어가면 그런 오타는 덜하겠지요?

사실 생각해보니 예전에 독서노트를 기록한 적이 있습니다. 집 근처 작은도서관에서 책들과 데이트를 즐기던 날이었습니다. 한번 가면 열권넘게 빌려오는데 다 읽고 적어놓고 싶은 부분이 자꾸자꾸 생겼습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라 밑줄을 그을 수도 없었고 여백에 적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독서노트를 만들었습니다. 숫자 1로 시작해서 책의 제목, 지은이, 간략한 내용이나 그날의 느낌, 그리고 남겨두고 싶은 문구들을 펜으로 적었습니다. 물론 땀이 많이 나는 날에는 수건이나 빳빳한 종이를 손 아래 대어놓고 적었습니다. 그렇게 적은 독서노트가 한 권 두 권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적은 독서노트 덕분에 첫 번째 책 <책 먹는 아이로 키우는 법>에 유명한 명언이나 인상깊은 구절을 많은 부분 인용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독서노트가 제 글쓰기에 자양분이 된 셈이지요.


한 꼭지를 완성하고 나니 A4용지 한 페이지가 채 되지 않았습니다. 아! 한 꼭지를 이렇게 써도 되는구나! 그때 알았습니다. 두 페이지 넘는 양의 꼭지를 채우려고 내심 부담을 느낀 적도 많았습니다. 글은 이렇게 써야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필사를 해보니 글에 대한, 원고에 대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책들은 한 꼭지당 어느정도의 분량(보통 2페이지)을 채우고 책으로 출간됩니다. 하지만 개인의 취향처럼 책에도 각자의 취향과 색깔이 묻어납니다. 글쓰기에서 중요한 건 의무감, 무조건 이래야 한다 라는 걸 좀 벗어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분량이 적다고 해서 내용의 충실감이 적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짧은 구절 속에 꼭 필요한 것들로만 채워져 있어 저에게는 더 좋았다고 할까요?


지금은 책 한권으로 시작했지만 마음에 드는 꼭지를 만나면 다른 책들도 도전해볼 생각입니다. 이 책을 필사하기를 잘했습니다. 앞에서 작가의 프로필에 대해서도 적었지만, 다시 시작하는 마음가짐, 멘토 그리고 가족. 소중한 가치에 대해 일깨워주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접어두었던 독서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저 보다 훨씬 더 책을 즐기고 퇴근후에도 책을 늘 곁에 끼고 있고 글쓰는 전업작가입니다. 글쓰기에 대한 깨우침도 이 책에 들어있어서 어쩌면 횡재한 기분이었습니다.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 책의 제목처럼, 저도 ‘이제 다시’ 시작해보려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말이지요.


필사 역시 책을 읽는 것과 비슷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지 않습니다. 그냥 책을 읽다가 책 구절이 마음에 들면 그 페이지 꼭지부터 써내려갑니다. 한 꼭지를 쓰고 우와 벌써 다썼어? 하면 또 다음 꼭지를 써봅니다. 글이 내 마음에 착착 와닿을 때가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외치고 싶은 구절도 있습니다. 나와는 조금 거리가 있네. 싶은 구절이나 꼭지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그냥 넘어갑니다. 글쓰기에 대해 더 배우고 싶은데, 여기부터 적어볼까? 그 꼭지부터 적어내려갑니다. 한 꼭지당 분량이 한 페이지 정도라서 큰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시작하려면 부담스럽지 않은 가벼운 것부터 시작하는 게 좋습니다. 거기서 얻는 것이 있다면 금상첨화구요.


아이들과 함께 하기에는 글자수가 적은 그림책도 좋습니다. 그림책에는 의외로 감격스러운 문장들이 알알이 박혀있습니다. 그림책 속에는 그림 하나에 글자 하나에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아이들이 보는 책이니까요. 그래서 엄중하고 또 선정해서 그림책을 만들어갑니다. 그림책 필사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필사를 하려면 내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야 합니다. 그리고 너무 어렵지 않은 가벼운 책으로 시작하는 걸 추천하고 싶습니다. 필사할 책은 내가 본받고 싶은 분의 책이면 좋겠습니다. 저자의 말투나 필체를 배우고 따라갈 수 있으니까요. 독서도 글쓰기도 필사도. 의무감으로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꾸준하게는 합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실들이 한 겹 두겹씩 쌓이는 것일 테지요. 오늘도 가볍게 필사 한 꼭지를 하고 이만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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