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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정 Apr 02. 2021

립스틱은 최소한의 외출도구다

비 오는 날에 분홍 립스틱을 바르겠어요

지하철에서 화장하던 여자

내가 처음 지하철을 타게된건 20대 초반. 편입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서울에 첫발을 딛었다. 생전 타보지도 않았던 지하철을 타보는 경험이란 생소했고 신기했다. 솔직히 두려운 감정이 앞섰다. 노선도를 보고 따라가기는 쉽지 않았고 지하철이 처음인 내게 꼬불꼬불한 길은 나를 헤매게 했다. 중간중간 물어물어 길을 따라가면서 마치 외국여행객이 낯선 도시에서 길을 묻는 것과 같은 경험을 했다.

서울에 상경해서 대학교를 다니고 지하철이 익숙해져갔다. 여전히 지하철 노선은 복잡하고(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 길을 잘못들어 헤매기 일쑤였지만, 자주 가는 노선은 길이 익숙해져갔다. 그렇게 서울생활에 지하철에 적응해갔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병원임상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바로 코 앞에 집을 얻어 밤길에 까무러치게 놀란적은 몇 번 있었고 가끔 쉬는 날이면 지하철여행을 하곤 했다.


지하철에서 생소한 장면 하나는 아침 출근시간 지하철에서 화장하던 여자를 보게 된 것이다. 아침 출근시간은 누구에게나 바쁘다. 세수를 하고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화장을 한다. 늦게 일어나면 당연히 출근준비시간을 더욱 줄어든다. 시간없는데, 바쁜데, 이러다 지각할라. 큰일났다! 외치며 출근준비를 서두른다. 그리고 으레 늘 그렇듯이 화장품 파우치를 챙기겠지. 가방안에 화장품 파우치는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있다. 간단히 립스틱정도와 거울정도만 가지고 다니는데, 집이 아닌 바깥에서 화장하는 경우는 다르다. 화장품 파우치 안에 선크림, 파운데이션, 팩트, 립스틱, 거울 등이 있어야 한다. 화장품 파우치도 함께 출근한다.


지하철노선 중 거의 끝이겠지. 아침시간 여유롭게 화장을 할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함께 출근한 화장품 파우치를 꺼낸다. 팩트의 거울을 열고 (기본베이스인 로션, 선크림,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나왔다면) 색조화장을 시작한다. 특히 눈화장이 중요하다. 눈화장에 공을 들인다. 이미 기본바탕을 바른 상태이기에 아이새도우를 눈두덩이 얇게 펴바르고 눈을 깜빡인다. 팩트속 거울을 보며 왼쪽, 오른쪽 눈에 엷게 발린 화장을 확인한다. 옆사람은 의식하지 않는다. 만약 옆사람을 의식하는 사람이면 절대, 네버 지하철에서 화장을 할 생각을 못할것이다. 톡톡톡 팩트를 얼굴에 두드리기도 한다. 눈화장은 보통 아이섀도우> 아이라인> 마스카라로 진행이 되는데, 눈화장의 포인트는 마스카라다. 아이섀도우와 아이라인을 생략해도 마스카라는 꼭 하는 사람들이 있고, 아이라인만 그리는 사람도 있다. 나는 한창 멋부리고 다닐 시절, 아이섀도우와 아이라인은 꼭 챙겨서 했던 편이다. 마스카라는 가지고는 있었지만 가끔, 정말 화장에 공을 들여야 하는 특별한 날에만 했던 것 같다.


지하철에서 화장하던 여자는 어느새 아이라인을 마무리짓고 마스카라를 꺼내들었다. 붓펜과도 같이 생긴 마스카라 통에 액체를 콕콕 찍어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속눈썹을 따라 마스카라를 바른다. 마스카라를 바르기 전에 속눈썹집게? (정식명칭은 아이래쉬 뷰러)를 사용해 속눈썹을 집어올려주어야 한다. 그래야 속눈썹이 올라가면서 눈이 커보이고 선명해보이고 또렷해보이는 효과를 볼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을 세밀하고 섬세하게 진행해갔다. 흘끔흘끔 화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맞은편에 앉은 나는 과연, 저사람처럼 화장을 할 수 있을까? 지하철이란 장소에서? 여러사람이 많은사람이 볼 수도 있는 장소에서 내 민낯을 공개할 수 있을까? 절대로. 노우.


아가씨에서 엄마가 되고 화장품이 훅 줄었다.

내 옷을 사고 내 얼굴만 다듬고 나만 생각하던 아가씨가 엄마가 되었다. 임신을 하고 입덧을 하고 화장품이 지워지던 것을 느끼며 아이의 자리를 하나씩 내어주기 시작했다. 콩콩 발로 차는 아이의 태동을 느끼며 행복했고 피부의 변화를 느끼면서도 아주 자연스럽게 아이를 생각하게 되었다. 만삭이 되어 배가 불러오고 피부가 팽창하면서 살이 틀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튼살크림을 주문해 바르기 시작했다. 기존에 사용하던 색조화장품이나 향기가 짙은 화장품은 자연스럽게 나와 멀어져갔다. 잘 먹지도 못하는데 곱게 화장을 할 엄두가 안났고 화장을 해도 구토를 하느라 화장이 지워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입덧이 한창 심할 때 신림동에서 지하철을 타고 오며가는 거리에선 향수냄새와 짙은 향을 맡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리고 메스꺼웠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와 아이는 일심동체가 되었다. 모유를 물리고 기저귀를 갈고 밤중수유를 하고 24시간 늘 아이와 함께 생활하는 엄마에게 화장은 사치였다. 로션만 발라도 감지덕지였다. 혹여라도 살갗이 보드라운 작은 꼬맹이에게 자극적인 화장품이 닿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화장을 하지 않았고 늘 하고 다니던 목걸이, 귀걸이, 팔찌 등 악세사리들도 모두 내려놓았다. 아이와 살과 나의 살이 맞닿고 낮에도 밤에도 아이와 늘 함께였다. 출산을 하고 엉기성기 벌어진 몸이 제자리를 찾기 위해 약 100일간 산후조리를 해야 한다. 아이를 먹이고 재우고 입히면서 나도 조금씩 일상으로 돌아왔다.


차에서 화장하게 된 이유

둘째가 태어나고 다시 아이와 한몸이 되면서 화장품과는 작별의 시간을 가졌다. 100일의 산후조리기간과 꼼짝마 시간이 흘러갔다. 그동안에 나와 아이를 살펴주는 산후도우미가 방문해서 마사지와 스트레칭을 도와주고 먹거리를 챙겨주며 육아방법을 완전히 까먹은 나에게 하나 둘 몸에 익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일년여간 집에서 온종일 아이와 함께였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악세사리인 귀에 딱 달라붙은 조그만 귀걸이도 한쪽을 잃어버렸다.

아이가 돌이 될 때쯤 어린이집을 다니고 아이돌보미가 우리집을 방문했다. 나는 다시 직장을 구하고 방문간호를 시작했다. 방문간호는 주로 차에서 이루어진다. 아침 7시30분경 아이돌보미 선생님에게 아이를 인계하고 집에서 나오면 10여분의 시간이 남는다. 그동안에 오늘의 방문일정을 살피고 화장을 시작한다. 집에서 해도 되지만 안방에서 함께 잠을 자는 아이가 깰까 화장대 불을 켜기 어려웠고 화장실에 서서 하기도 불편했다. 돌봄선생님이 오는 시간에 방이나 다른 공간에서 화장품을 두고 화장을 하기에도 뭔가 어색했다. 그래서 차에서 화장을 하게 된 것이다. 차에는 늘 나의 파우치가 놓여있다. 선크림, 핸드로션, 파운데이션, 립스틱은 차에서 늘 함께한다.


방문을 다니면서 차에서 대기하는 시간이 있었다. 해가 비추는 날에도 비가 오는 날에도 방문시간을 맟추기 위해 차에서 대기했다. 방문을 할 때에 꼭 끼고 있던 마스크를 걸어두고, 화장품 파우치를 연다. 차안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치기도 한다. 마스크를 착용하지만 립스틱은 꼭 바른다. 환자를 대할 때 마스크를 벗는 일은 없지만, 립스틱은 최소한의 화장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상대를 대할 때 다른 화장은 안 해도 빨간색, 분홍색 립스틱을 바르면 왠지 화장한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입술을 바르지 않으면 창백해보일 수도 있고(특히 선크림이나 파운데이션을 한 상태에서 립스틱을 안바르면 정말 아파보인다!) 내 스스로가 위축되기도 한다.   


비 오는 날에 분홍 립스틱을 바르겠어요~

립스틱은 최소한의 외출도구다. 엄마의 최소한의 자존심이라고 생각한다. 정성껏 꼼꼼이 화장을 하기에는 시간도 여유도 없다. 아이에게 입맞춤을 하고 아이의 살에 부비부비를 하지만 간단하게라도 '나'를 위해서 입술을 발라보자. 빨간색 바셀린도 좋고 색이 없는 립케어도 좋다. 잠을 못자고 피곤한 내 몸은 입술이 제일먼저 드러낸다. 건조하고 튼 입술에 촉촉한 립케어를 선물해보자. 약국에도 팔고 올리브영에도 파는 수많은 종류의 립케어 제품 중에 내가 끌리는 녀석을 골라보자.


여자들은 립스틱 선물이 좋다. 입술의 감촉이 민감하고 핑크빛 색이 감도는 립스틱 하나가 나를 행복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게 마스크를 써도 립스틱을 바르는 이유이고 굽굽한 비오는 날에도 분홍 립스틱을 바르는 이유다.


지금은 안바르더라도 보고 또보고 언젠가.. 발라야지 마음이 생기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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