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익숙한 글귀가 들려온다. 오늘도 여느날처럼 소아과에서 근무하는데, 소아과 대기실에 앉은 엄마가 책 읽어주는 조곤조곤 목소리가 들려온다. 익숙한 글귀 그리고 책구절이다. 나는 소아과 대기실에 부모님과 아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그림책을 한두권 선정해 책장위에 진열해둔다. 오늘 보민이 어머니가 그 책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보민이에게 읽어주었다.
<소중해 소중해 나도 너도> 그림책은 노란빛깔을 띤 귀여운 그림책이다. 그림책으로 아이들에게 성교육을 할 수 있다니, 지금 생각해보니 참 놀랍고 매력적이기까지 하다. 나는 사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산부인과 병동에서 신규간호사로 근무를 시작했다. 신규 간호사라서 (실습을 했었지만) 사람을 대하는 법도, 주사를 찌를 법도, 사회 생활을 하는 법도 아무것도 몰랐다.
개원병원이었던 강동경희대병원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신규간호사가 산부인과에서 근무를 시작했으니, 눈치는 눈치대로 보고 못하면 꾸중도 들어가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티어 낸 듯하다. 지금도 선하게 생각나는 야간근무선생님에게 혼이 나기도 했다. 무서운 눈빛으로 나를 질책하는 그때의 상황은 오랜시간이 흐른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수술환자도 많았고, 출산한 산모도 있고, 갓태어난 신생아도 있었기에 늘 긴장의 연속이었고 또 그 안에서 배워야 하는 부분들이 상당히 많았다.
산부인과에 이어 소아과병동, 이비인후과 병동이 차례대로 준비가 되며 근 5년 가까이 입원병동에서 울고웃으며 지냈다. 내가 원해서 갔을까? 사실 나는 한방병동에 입사지원서를 냈었다. 하지만, 나와 또다른 친구가 지원을 하면서 어떤 기준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산부인과로 첫 발령을 받았었다. 막연히.. 한방병동에 가면 편하겠지? 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모든 과가 그렇듯, 각 과마다 장점과 단점이 다분히 존재한다. 일이 바쁘거나 긴장이 필요한 부서는 그만큼 경력이 쌓이는 것이나 배워서 익혀야 하는 부분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또한 그 속에서도 내가 잘하는 부분이 분명 한 두가지씩은 있다. 병동이란 한정된 범위안에서 사실 나의 재능을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하고 싶은지, 어떤 사람과 어떤 삶을 살고 있은지.
우물안 개구리가 싫어 뛰쳐나왔지만, 막상 나오니 막막했다. 법률사무소, 임상시험회사, 방문간호사, 또다른 수많은 병원들. 병원 안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전산이나 서류작성을 비임상회사에서 접하며 익힐 수 있었고, 병원 안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방문간호의 세계에서는 한 사람 한사람을 만나가며, 그들에게 몰두할 수 있는 값진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특히, 오롯이 나의 자유로움을 추가해 내가 응용가능한 부분을 접목시킬 수 있다는 부분이 참 좋았다.
나의 지금을 있게 만들어 준 가장 큰 부분은 역시 "육아"다. 육아라는 세계는 학교에서, 직장에서 배울 수 없었던 상상 그 이상의 세계를 나에게 선물했다. 책을 가까이 하고 싶었지만 쉽게 접할 수 없었던 그 시절에 나의 아이와 함께 하는 육아라는 과정에서 책과 그림책 세상 속에 스며들 수 있었다. 집 가까이에 있던 작은 도서관을 매일같이 드나들면서 책의 재미를 알았고, 그림책의 재미를 알아갔다. 무엇보다 내가 읽어주는 그림책을 눈을 똘망똘망 뜨고 기다리며 즐거워하는 아이 덕분에 나는 그림책이라는 세계와 연결되었다.
그림책을 만나고 아이와 함께 울고웃는 시간이 나의 일상을 채워나갔다. 그림책이라는 연결고리가 어쩌면 지금의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준 듯하다. 그림책을 보며, 우연히 성교육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그림책과 성교육을 콜라보로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아! 가정에서 성교육을 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이거였다니! 유레카 를 외치고 싶은 순간이었다.
사실 내가 성교육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결정적 계기는 바로 정인이사건이었다. 아동학대가 일어나서는 안되지만, 너무나 흔하게 일어나고 학대예방을 위해 어떤 예방책들이 있을까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보니, 성교육이었다. 우리에게는, 앞으로 우리 아이들에게는 "제대로 된 성교육"이 필요했다. 그래서 성교육을 시작했다.
브런치에 올린 나의 최근저서 <하루10분 그림책읽기의 힘> 내용 중 일부를 도서관 사서님이 우연히 보시고 나에게 연락을 해오셨다. 그림책으로 함께하는 성교육 강의를 해달라는 내용이었다.나는 흔쾌히 좋다고 답하고 바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의 첫번째 비대면 도서관 강의가 진행되었고, 많은 부모와 아이들이 나의 강의를 듣고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좋아해주었다. 무엇보다 가정에서, 집에서 아이들을 가장 잘 아는 부모가 성교육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소득이었다. 성교육 부모가이드북과 다양한 그림책을 추천해주었다.
바로 다음달 5월 3일에는 김포의 한 유치원에서 그림책성교육 대면강의를 진행하게 되었다. 코로나시기가 끝나가고 이제는 마스크를 벗었다. 부모님을 대상으로 마주보며 그림책성교육 강의를 하고 메시지를 전할 수 있게 된것이다. 지금까지 나의 길을 한길 한걸음 걸어오면서 이길이 맞나? 하는 생각보다는 어떻게든 되겠지. 한번가보자 하는 마음으로 걸어왔던 것 같다.
완벽할 수는 없으니 지금있는 기회에 집중하기로 했다. 지금 내가 가진것을 이용하고 내가 가진 공간을 이용하고 잠시잠깐이라도 부모님들에게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시간을 이용했다. 많은 사람보다는 "단 한분이라도" 에 집중했다. 단 한분이라도 나의 강의를 기다려준다면 나는 지금처럼 달려갈것이다.
산부인과 간호사로 병원에서 시작한 일이 이제는 나의 강의를 기다리는 가정으로, 유치원으로, 도서관으로 내가 찾아가는 일이 되었다. 그림책 성교육강사로 말이다. 길 건너 하나씩 있는 편의점처럼, 나의 최종목표는 그림책편의점을 만드는 것이다. 누구나 쉽게 와닿을 수 있고 그림책을 보고 만지고 그림책을 읽어줄 수 있는 그림책편의점 이란 세상을 이 땅에 드리우고 싶다.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다는 걸 안다. 나와 함께 해주는, 모임에 참여하는, 그림책을 사랑하는 그림책메신저들이 있기에 나는 오늘도 나의 길을 가고, 함께 길을 만들어간다.
막막하던 시기도 깜깜하던 시기도 돌부리에 걸려넘어지기도 했지만, 내가 바라는 그곳을 향한 믿음하나로, 단 한걸음이라도 걸어가는 행동하나로 지금의 나를 만나고 또 만났다. 지금의 결과물이 과거에 내가 뿌려놓은 씨앗이라는 걸 안다. 그리고 미래의 나는 지금내가 뿌리는 씨앗을 또 거둘거라는 걸 안다. 열 걸음도 단 한걸음에서 시작하는 법이니까. 오늘도 그 한걸음을 내딛는다. 이렇게.